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은수 Sep 13. 2024

 '그래도 단독주택'_김동률

책_강남 아파트를 팔고 강북 주택가 단독에 산다고?

옛날을 생각하면 걷잡을 수 없어지는 때가 있다.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래서 그냥 현재를 살자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 수가 차라리 맘이 덜 아프기 때문이다.




'마당이 있는 집'에 대한 판타지.

르 코르뷔지에와 알랭 드 보통은 집을 두고 '영혼을 다독이는 공간'이라고 근사하게 정의했다 한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과 욕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는 책의 '들어가며'를 읽을 때, 공감을 넘어 빼박 사실의 단단한 벽 앞에 지은이와 함께 서 있는 듯했다. 그런 사실에도 강남 아파트를 처분해 북한산 기슭 단독 주택으로 옮긴 이야기가 궁금다. 유독 땅이 좁은 한국에서 저 판타지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뼛속 깊이 도시 사람인 나도 그럴진대. 그러나 저 벽 앞에선 어지간한 '단단함'이 아니라면 이를 실행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지은이는 어떤 단단함을 가진 사람일까.  


익히 예상하듯 이 책을 덮고 나면 도시 모퉁이에서 '단독 한 해 살이 체험'을 솔찬히 하고 온 당신을 만나게 된다. 한 중년이 뒤늦게 일군 단독에서는 대문 밖 화단 대나무가 당신보다 앞서 인사 건넨다. 처음엔 손님으로 마당 한편에 작게 발을 디밀었는데 어느새 영판 주인인 듯 퍼질러 앉아 지은이와 함께 포복 자세의 질경이를 뽑고 김장도 하며 눈마저 쓸고 있는 당신이 된다. 목이 달아난 생쥐의 시체는 그대에게 잘 보이려고 고양이가 주는 선물이라는 것, 이효석처럼 마당에서 낙엽을 태우며 낭만적인 흉내를 내면 소방대원이 출동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사실. 낡아감에 대한 소묘 알퐁스 도데 단편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이  '별' 보다 좋은 건 단독이 가진 독보적 시간성을 아는 자의 편애라는 것. 물론 이것들은 당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단독살이 정담의 일부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함께 단독 살이 단맛 쓴맛을 보다가 집이 웅크리는 겨울을 맞을 즈음, 근원적 노스탤지어인 유년 계절 엮어 주 이 집 사무집주인을 본다. 지은이와 같은 연배 독자라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실감보수에 흠뻑 동참하다 가슴이 아 번번이 다음 책장을 넘기지 못하기도 한다.


바지랑대를 세워 빨래를 널면서 '지금은 늙으신 어머니가 그때는 몹시도 젊었다. (P.101)' 라고 그가 말할 때, 몹시도 젊었던 나의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린다. 방학이면 자반고등어 한 손을 달랑거리며 즐거이 찾아가던 이모네 나들잇길, 영화 '태양은 가득히' 덕에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을 가고야 말리라 생각하던 십 대, 박인희의 '모닥불'에는 찬란한 이십 대가 있었다고 단독의 불멍이 말하는 장면. 이들은 나의 옛 친척과 내 그 시절 영화와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맞아, 그랬어, 그랬었지....  이제는 재개발로 사라져 버린, 어디에도 없는 옛집과 옛골목, 옛 동네. 한 중년의 뒤늦은 단독 살이는 그 기억을 오롯이 감싸 안게 해 주는 것이다.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시 오지 않을 시간을 되새김은 부질없다만 서리서리 기억을 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때가 또 중년이다. 그러니 단독을 선택한 그의 단단함은 내 살아 행복했던 나날과 얽힌 사업에 다시 골몰할 수 있다는 기쁨 때문 아닐까. 지난히 세월을 살아내고 이제 남은 날이 그보다 짧은 애수 어린 인생이 되었지만 그래서 더 또박또박 순간을 느끼고 싶은 간절함 때문 아닐까. 허드레 시간이 많은 노년을 '바쁘게' 만드는 단독은 시간 깨기 꿀팁이라는 듯 지은이는 너스레를 떤다지만.





단독자연, 이웃, 감성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선택은 쉽지 않다.  책을 읽었다고 하여 "과감히 단독 살이? "라고 선뜻 말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서두에 언급한 '이 땅에서 집의 의미'는 여전히 철옹성으로 우리 앞에 버티고 있고 다른 한편으론 사람의 성향이란 변수 있다. 아파트 공간도 못 다스려서 허덕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단독이란 그야말로 '판타지'일뿐 그 다사다난을 견딜 재간이 없다. 하지만 집 아저씨 마냥 옛날스럽고 넉넉한가 하다가 '유기농은 개뿔' 볼멘소리를 늘어 놓는 주인장 키득대다 보면 이런 현실맛이 재미지 싶다. 요점 추린 듯 똑 떨어지는 단문이 자연 속에서 어느새 박해지고 기야 감성이 후드득 묻어나는 문장 되어 마주할 때면 나는 그의 단독주택 대문 앞에서 여전히 서성일 수밖에 다. 철옹성이고 성향이고를 떠나 '남은 삶은 이렇게 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볕이 속절없이 따뜻한 봄날, 한 곡조 뽑아야겠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사월의 노래>,... 완연한 봄, 앵두나무 새순 사이로 여린 봄 햇살이 뭉텅뭉텅 쏟아지고 있다.
P. 38


환청인가, 순간 나무가 내게 속삭였다. "나의 어머니는 자연이다. 내가 죽는 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 자연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 것이다. 나는 내 조상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오랜 세월 행복하게 살았다. ...주인인 그대가 걱정하고 염려할 일이 아니다. " ... 나는 안다. 나무가 나와의 이별을 무척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P. 79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 오후, 벤치에 앉아 나직이 피셔디스카우를 듣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단독살이 덕분이다. 가냘픈 구절초 꽃잎 위에 가을볕이 소복하다. P. 129


가지치기를 끝낸 뒤 마당 구석에 쌓여 있는 마지막 낙엽을 치우고 하늘을 바라본다. 눈은 언제 오려나. 늘 마지막 낙엽을 치우면 첫눈이 오더니만... 어느새 바람이 차다. 집은 이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웅크리고 있다. P. 121


단독살이에 봄은 그냥 오지 않는다. 겨울을 견뎌내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이다... 내일 모래가 대보름...터질듯한 둥근 달  속에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며 뛰어 놀던 어린 내가 보인다. P.181


단독은 살아있음을 충분히 감각하게 하는 보물임에 틀림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짜 나를 찾아라_법정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