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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Jul 13. 2023

02. 장 그르니에, '까뮈를 추억함'_여학생의 답

세상의 답은 다 뻔했기 때문에 특별히 사춘기라고 겪을 게 없어서 심심했던 소녀가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답들. 착하게 사는 사람이 결국 행복하다든가,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것들은 손에 닿지 않아 더 애를 태운다든가.


톨스토이 단편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 생각했겠지.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청량할 때였지만, '소나기'를 맞고 같이 감기가 들던 초여름 국어 시간. '소년'을  생각하면서 또 그런 생각을 했겠지.


지금 보아도 그건 답 아닌가.  


사람은 살아갈수록 성장하는 게 맞는 거 같은데 이상하다, 여학생 시절의 내가 내 인생에서 제일로 아름답게 성장한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내가 가장 훌륭했다는 생각.




저렇게 심심-하니 살다가 대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성적이 말도 못하게 떨어졌다. 잔인하게 전과목 점수를 탈탈 합쳐 전교 등수라는 게 있던 시절이었으니. 성적은 공부를 해야 오른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그렇다보니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는 늘 만원이었지만 기점에서 가까운 우리 집이라 그나마 앉아 갈 수 있었다. 이 30분이 내가 유일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동안은 버스에 앉아 다른 학생들의 무거운 가방을 받아주고 무릎부터 쌓인 가방더미 위에 적당히 각도를 잡아 책을 펼쳤다. 그러면 순식간에 학교에 닿아 내려야 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내게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 있다.  


현진건의 '무영탑'. 그림자가 없는 탑. 제목도 너무 신기하지 않은가. 내 기억 속의 이야기는 이렇다. 백제 사람 아사달이 신라 불국사 석가탑을 지으러 간 후, 아내 아사녀는 오지 않는 사랑하는 남편을 찾아 가지만 신성한 불사가 끝나기 전까지 만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연못에서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칠 날만 기다리다 그녀는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편, 귀족들이 드나드는 불국사이니 어여쁜 구슬 아가씨가 기도하러 와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아사달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책에 한 줄도 서술되어 있지 않았던 거 같다. 아니면 그때의 내가 눈치를 못챘거나. 사랑하는 부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고 연못가에서 통곡하며 그녀의 모습을 미친듯이 돌에 새기고 있을 때, 구슬이가 나타나서,


" 아사달님이 나를 보셨네. 조각이 사람의 형상인 것 같으니 그 얼굴에 제 것을 새겨 주세요."


구슬이의 사랑을 삿되게 여긴 부모가 그녀를 화형시키고자 하였던 직전이었기에.


 아, 가혹한데. 아사달이 새긴 얼굴은 누구였을까. 너무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이 후달렸다.


결국은 그도 물에 빠져 죽었고, 그곳에 남겨진 그의 조각상은 '부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말의 그 문장을 읽고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아사달 왈. 누굴 새겨야 하나? 아사녀? 구슬이? 에라, 모르겠다. 부처나 새기자.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아사달은 아사녀도 새기고 구슬이도 새겼구나. 그 마음이 지극하게 아름답고 애처로워 부처가 되었구나.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구나.


세상의 답은 정해져 있다고 굳게 믿던 여학생에게 답은 또한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화두가 달려 들던 순간이었다. 거기서 세상의 애잔과 고통이 비롯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던 거 같다. 1+1=2 만 있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 1+1=1이었던 아픈 영화, '그을린 사랑'의 공식 같은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 여학생의 앞날에는 무엇이 답인지 알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아가리를 벌린 어둡고 긴 터널처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그때 읽었던 문학 작품인 것 같다. 사실 문학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발칙하다. 읽다보면 '이해하지 못할 생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가 많았다. 문학은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저 너머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받아들일 끈덕지 하나 없는 생조차도 이해하게 만들어 버리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그가 창조한 인물의 삶에 내 삶도 속절없이 공명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세상의 답은 뻔해서 심심했으며 또한 그 답은   없기도 했으므로 말수가 줄어야 했던 여학생. 내 생에 가장 훌륭했던 그이가 아직  나를 잊지 않고 바라 보고 있었으면.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그르니에가 까뮈에게 주던 글을 함께 읽고 싶다. 이런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나폴거리며 서점을 나오던 소녀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

'까뮈를 추억함'.









혹시 있나 찾아보니 이렇게 황량한 모습이다. 그래도 여태 내곁에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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