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서 공부를 곧잘 했던 손녀가 커서 당시로서는 최고로 치던 여자 직업, '선생질' 하기를 바랬던 할머니.
"할매. 내 화가 될끼다."
'화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터이니 한다는 말씀이
"니, 하가 아이가?"
우리집은 진양 하씨 일족이었다.
그 무렵부터 화가에 대한 꿈은 매주 화요일 5시인가, 어린이 방송 시간 '프란다스의 개'를 보면서 부풀 대로 부풀기 시작했다. 아로아가 되어 네로와 먼통이 트는 아침, 길게 뻗은 가로수를 누비며 잊을 수 없는 그 길을 파트라슈와 함께 걸었다. 얼마나 행복했던지. 담날 일어나면 꿈이었다.
파트랴슈 때문에 현실 개도 그렇게 무조건 사랑스러워야 했다. 전강이에서 제 코털이 닿을 만한 거리로 쫓아오던 동네 검둥이한테 물릴 뻔 하고서야 개 로망은 접었다. 아직도 내 전강이는 기억한다, 고놈 코털의 물기를.
네로가 보고 싶어하던 그림. 가난한 네로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루벤스. 때마침 바람이 커튼을 들추어 네로는 숨져가며 루벤스의 찬란한 빛을 보았다. 나는 엉엉 울며 그런 네로를 보고 있었고. 왜 왜...
이후 네로는 나에게 그림 그리는 남자의 원형이 되고 말았다. 냉철히 따져보면 화가가 되는 게 아니라 화가의 여친이 되는 게 꿈이었네... .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공부하느라 그림은 잊고 살았다. 사실인즉 그림은 방학 숙제 아니면 그린 적도 없다. 어쨌든 네로만 생각하면 나는 심장이 쿵쾅대던 어린 시절 꿈이 떠오른다. '착하디 착한 네로의 선한 눈망울에 퐁 빠지고 싶다'는 신파조도 서슴지 않고 읊조릴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런 게 남아서일까. 나는 그림 잘 그리는 남자를 보면 무턱대고 반한다. 고등학교 때 초로의 미술 선생님, 아가씨 시절 소개팅했던 회화 전공남, 절친의 띠동갑 나이 많은 설치예술가 남편 그리고 최근 조각하는 블로그 이웃님까지. 노소 불문이다. 혹여 광안리나 해운대 행사 때, 거리 화가 일고여덟 명이 해안 따라 쭉 이어 앉아 케리커처를 그리고 있으면, 아아아. 어지럽다. 이런 게 고문이지 말입니다! 내가 못하는 걸 척척 해내는 그 능력을 동경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단 한 사람. 도자기 전공하는 시이모부는 싫다. 푸근하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이다. 맨날 소식 없다가 전시회할 때 딸랑 연락이 온다. 예봉같은 성격은 예술에 필요하다지만 싫다구!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서 보는 존재론적 미학의 관점에서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만, 그래도 나는 생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눈 맑은 작가가 좋다. 네로가 그랬잖은가. 이쯤되면 '네로가 아니면 나에게 죽음을 달라'이다.
네로가 왜 숨져가야 했는지 뚜렷이 잘 기억 나지 않아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장면을 찾아 보려다 그만 두었다. 네로의 시대를 사회학적으로 조명한 글을 어디선가 보기도 했으나 몇 줄 읽다가 덮어 버리기도 했다. 너무 가슴이 아플 것 같아서이기도 하나, 내 마음속에서 네로는 '그림 잘 그리는, 따뜻하고 착해서 눈망울이 반짝이는 남자', 그때 그대로 여전히 남아주길 바라기 때문 아닐까 싶다. 영원한 나의 연인, 네로.
이런 날은 그 만화 주제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파트라슈!"
*세월이 감에 따라 여러 버전이 있지만, 이 첫 버전이 내 그 시절 것이다.
보테닉 첫 그림 22. 9. 21
휴직 마지막 해, 우리 동네 평생학습관에서 보테니컬 수업을 석 달간 수강했다. 처음 채색 22. 9.26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70년대는 돈이 많지 않으면 그런 걸 할 수 없었다. 물감이나 스케치북, 하물며 연필도 귀하던 시절. 국민학교 방학 숙제로 그림은 꼭 있었는데 가끔 상을 탄 기억이 있다. 그땐 반공 포스터, 혼분식 포스터 그런 것도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