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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Jul 24. 2023

존경하는 만남

후배.

겨울이 겨울이어서 좋은 날, 존경하는 후배를 만난다.


가 좋아하는 곤드레밥 집. 오늘은 창가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 찍지 말라는 후배. 하하. 창만 찍을게. 이쁘잖아.




이곳의 밥맛은 품위 있다. 그러면 그 맛이란 것이 좀 중후한가 할 텐데 그렇지 않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모차르트의 경쾌함 같은 것이 묻어 나온다. 밥을 비빌 때, 곤드레 향이 사라락 올라오는 중에. 세 쪽으로 나란히 뉘어 놓은 김치를 하나 또옥 들어 올려 아삭 씹을 때, 봄동 무침 겉에 발린 양념의 투명한 윤기를 잎사귀 다치지 않게 포도시 섞을 때, 경쾌의 품위가 어김없다. 이 경쾌를 두고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라 여기로 온다.



* 3.4악장이 이 집과 좀 더 어울리는 거 같다



일 년도 넘게 못 만나다가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나 희귀병에 걸렸어요."

"...  ."

달려가서 만난 그는 가발을 하고 있다. 이젠 괜찮다고, 시험 중인 약이 듣는다고.

다행히 곤드레밥을 맛있게 잘 먹는다. 적당한 침묵, 적당한 달그락. 이곳에 어울리는 그 적당함 속에 한 번씩 크게 웃음이, 시원 탕탕한 어록이. 오랜만에 보는 그녀와의 시간이 즐거워서 미안하다, 아픈 사람을 두고. 적당함과 탕탕함 사이로 미끄러지기도 멈칫대기도 하는 그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오래전 일이지만, 아이들의 학교를 만들어 보겠다고 젊은 엄마 시절을 거의 바쳤다. 선의와 순수가 모여서 시작한 일이었고 무한한 행복이 있었으나 사람이 많아지면서 어려워졌다. 정치란 것이 이런 것일까. 눈앞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그래도 대꾸할 수 없고. 그런 조그마한 사회에서도 '허위의식'이라 항변하고 싶은 이데올로기가 생기더라. 애초에 마음먹은 기간은 나와의 약속이었으니 끝까지 지켰다. 그게 뭐라고... .


결국 사람들은 갈라졌다. 신형철 평론가를 강연에서 만났을 때 물었다. 이상을 공유하고 함께 한다는 것이 그렇게 허망하기도 하더라고.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이

"민들레가 솥뚜껑만 해지지 않잖아요. 민들레는 홀씨가 돼서 잘게 날아 또 퍼지잖아요."


후배도 그 길을 간다. 그러다 병이 온 것이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고마워한다고. 다만 이제 사는 방법을 바꾸겠다고.

"다른 사람들이 내 욕을 하면 그러려니 하세요. 이제 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욕도 하고. "

'그래. 남들이 당신 욕을 하면 아, 잘 살고 있구나 할게.'

세상은 착하고 좋은 사람을 모질게 만들려고 한다.






살아라고 병이 온다. 나는 잘 안다. 병이 와야지만 그치니까. 병을 하면 단순해진다.

그냥 살고, 싶다.

열심히 살기, 싫다.

무어가 되기도, 싫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류의 웃기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나를 산다. 그렇게 한 몇 년을 살았지. 지금도 딱히 열.씸.히.의 불을 지피고 싶진 않다.


'설레고 부산하라.'

최근에 이웃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말이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저 말의 진폭은 다를 것이다. 강물이 햇빛 받아 고요히 살을 떠는 것. 새가 둥지에서 이젠 나와서 먹이를 찾아보려고 이쪽저쪽 날아 보는 것. 내겐 그렇다. 저 말에 설렜다.


후배도 긴 시간, 혼자서 견뎌내고 이제 다르게 살아 보려 하고 있다. 그 빛깔은 나와 같지 않을지라도. 뜻이 있는 그가 꺾이지 않고 잘 나아가기를 빌게 된다. 항상 삶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는,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그것이 그의 품위이다. 조금씩 자라나는 그의 머리칼이 희망적.


그가 '경쾌한' 품위를 장착할 수 있도록 이곳에 와서 밥을 먹이고 싶었다. 이제서야  나를 만날 여유가 생긴 것이겠지만, 그의 꿈을 헤아려 주는 내가 되고 싶어 진다.

'뭐 당신이 모진 사람이 될까. 당신은 여전히 그리 살 거면서. 다만 당신의 건강을 위해 조금 내려놓아.'





한 상 경쾌하게 먹고 가려니 저 창이 우리를 다시 부르네. 레트로한 천정 등이 보이는 투명한 얼굴이 말갛게 예쁘구나. 주인 아저씨, 상을 치우신다. 우리 둘이 도란도란하던 모습이 어땠을지 보인다.


"커피는 내가 살게요."

"아니야, 오늘은 내가 풀 서비스."

"아니에요, 제가 사요."

"아니라니까."


다정한 티격태격이 쨍한 추위 속에서 반짝이다 겨울 오후 햇빛을 받자 오색으로 흩날린다.











ㅡ 올해 초, 겨울. 휴직 중 따스한 만남을 다시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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