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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Jul 19. 2023

좋은 옷

나.

옷을 산 지가 언젠지..

일을 쉬기도 했고 미니멀을 좋아하게 되기도 했고.


음식 탐을 하면 꼭 힘들어져서 며칠을 잘 못먹는다. 혓바늘이 돋고 입안에 이물감이 들어 곤욕을 치른다. 참 무식하구나... .

소비도 그렇다. 소비에 체하는 건 음식에 체하는 것보다 더 비참하다. 음식이야 뱃속에서 사라지고 말지만 소비의 결과물은 고스란히 곁에 남는다. 과한 잉여를 시시때때로 고하니 죽을 맛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소비도 필수품 말고는 잘 하지 않는다. 있는 물건들도 처분하고 싶은 마당에. 살아보면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대신 경험 소비를 늘리게 된다. 여행이나 문화 같은. 그러니 들어가는 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


마음에 드는 옷을 만나 오래오래 깨끗이 입는 것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 옷을 잘 보관했다가 다시 트렌드를 만나 입을 때 참 재미있다. 멋쟁이 고모가 입던 오래된 옷도 아직 입는다. 남편 옷, 아들 옷도 잘 입는다. 새 옷이냐 거나 어디서 샀냐 거나 관심을 보인다. 요즘엔 구할 수 없는 옷이거나 남자 옷이 되다 보니.


그래도 새 옷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복직을 앞두고 일하러 나가려 하니 요즘 트렌드가 너무 달라져있다. ;;


나는 뭐든 입으면 단정해 보인다. 그게 싫다. 적당한 선에서 그것을 깨 주는 옷을 좋아한다.  아니면 그런 애티튜드로 입는다. 교복 속에 갇힌 학생같이 갑갑해서.


갈수록 원단이나 재봉이나를 보는 눈, 디자인과 실용을 감별하는 눈, 또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옷을 보는 눈은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가격이....  정말 이 돈을 주어야 저 옷을 살 수 있나? 이럴 때면 왜 '좋은 옷'을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좋은 옷을 누구나 입는 세상'.  



디자이너의 10년이 다 된 컬렉션이다.  촌스러운가?  '아니올시다.' 이다. 단정한데 자유롭다.




오늘 뉴스인가, 암튼 시사 프로에 -요즘은 뉴스가 거의 토크쇼이던데-  이부진이 나온다. 그녀가 아들 졸업식에 참석했다, 아들 사랑이 엄청나다, 뭐 이런 내용을 시사 평론가란 이가 여러 차례의 정황 증거를 들어 증명해 준다. ;;  


그녀의 패션은 늘 화제이다. 동생 이서현이 패션에선 한 수 위이다. 그러나 이부진은  그 지위로 인해 더 주목을 받다 보니 패션도 실제 이상으로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그의 옷은 패션이랄 것도 없이 그냥 입기만 해도 좋아 보이는 옷들이다. 그렇지 않나.




'좋은 옷'의 정의는 다 다르겠다. 심리적으로 정의한다면 그 답은  더더욱 천차만별일 것이고. '값싸고 질 좋은 옷'은 주야장천 입는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옷에서 가격을 떼어내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옷'의 요건은 다음이다.

'사람과 환경에 다 좋은 원단, 생산 과정의 투명함, 튼튼한 박음질과 내구성, 디자인에 스며든 예술적 감각과 실용의 겸비, 유행에 크게 휩쓸리지 않아 자꾸 소비를 부르지 않는 단단한 묘미.'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일차적으론 '좋은 사람들'이다. 뚱딴지같은 억측이다만  그게 자연스러운 논리 같아 보이니. ;;   '좋은 사람들'은 그럼 무엇이냐. 그것 역시 많은 답이 있겠지만 내게는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사람들이 없으면 세상은 한 발짝도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세상답게 한다.


여기까지 오면 톨스토이의 '위대한 평민'이 떠오르지 않을 수없다. 선하고 삶에 충직하다. 시대 의식과 교양이 배어 있다. 논리로 배울 수도 있겠으나 잘 살고자 하는 인간이라면 그것을 삶에서 체득하지 않을 수 없으리. 그래서 그들은  '좋은 옷' 대접을 받아야 한다.


출처 포브스 지


그런데 현실은 아닌 경우가 많다. 돈이 없으면 그러한 좋은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세상이 그래온 지 하루 이틀이냐마는 오늘 저 옷값의 층위가 또 새삼스럽다.


매니시한 이 옷이 너무 맘에 들었다. 남편은 나에게 늘 허용적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일하러 가라고 옷을 사준다. 그런데 집에 와서 이 옷을 보고 있으니 왜 이리 맘이 불편한가. 옷이 옷이 아니라 어떤 상징이다. 오늘 그런 상징에 진 것만 같다.


이왕 산 거 그냥 즐겁게 입지 하시겠다. 그렇다. 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까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ㅡ복직을 앞두고 출근할 때 입을 옷 하나를 마련하던 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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