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조르바를 펼치자마자 문약한 서술자를 보고 충격이었다. 딱 내 모습이.. 조르바의 삶은 나와 같은 사람과는 극 반대편에 있는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아모르 파티' 인생 삼종 세트를 다 거머쥔 정열적인 자유인의 면모였으니 부럽부럽일 수밖에.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삶에 풍덩 빠지지 못하고 늘 관찰자이며 욕망에 시큰둥한 내 기질은 그대로 정주행이었다.
사십 대 중반이 넘도록 내가 '중년'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중년'이란 말은 어느 시대 국밥에나 말아먹는 단어인가.공과 사로 과업이 많은 시기이라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고 늘 젊어있어 다 감당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물론 30대도 과업은 그러하나 그때는 그나마 기운이 더 있었으니.
'갱년기'라는 쓸모 있는 '변명거리'를 만났기에 망정이지.'왜 이러나'하는 알 수 없는 일이 내 몸과 마음에서 노상 일어나고 끝없이 침몰해 갈 때, '니체'의 죽비 소리는 하루하루 살아갈 양식 같았다. 물론 니체의 원작을 읽었느냐 하면 나의 독서력은 그런 수준이 안되기 때문에 '짜라투스트라~', '이 사람을 보라' 정도 말고는 고병권이나 이진우 등을 읽었다. 그들이 애써 일궈 놓은 자료에 줄대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삼십 대엔 '부러운 인생 삼종 세트'를 장착하지 못했으나 힘은 여전하였고, 사십 대엔 '니체'를 만나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극복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확인받았으므로 나름 갱년기를 달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만,
건강을 비롯해 태어나서 가지고 왔던 것을 모두 다 소진하고 빈 껍질만 남은 50대.
그 어느 무렵, 꽃이라면 질색이던 내가 꽃 수업을 하며 위안하고 있다. 허허 참 별일일세. 수업이 마치면 교보문고로 올라갔다. 이삼 년 넘게 책 한 자 보지 않고 숨쉬기에 급급하며 살았기에 책들의 향연이 어질어질하였지만 책 냄새는 늘 그윽하고 깊은 서너 개의 가을 같은 것이었다.
최대한 미니멀하게 살겠다고 다짐한 후론 책도 잘 사지 않았다. 교보에서 보고 또 보다 '이것이야'하는 책만 간혹 사게 되었다. 평생 다시 볼 만한 책만. 그래서 늘 교보에 미안해 북카페에서 꼭 커피를 팔아 준다.
한 날, 서고를 기웃거리다가 이 책을 발견한다. 익숙한 스님 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서문을 펼치니 대번에 나를 훅 치고 들어 오는 말씀.
꽃들은 다른 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른 꽃들을 닮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나름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미가 되려고 애썼구나. 내 모습의 꽃인 채로 마음껏 피우다 가면 될 일을... . 그 작은 꽃, 채송화도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지 않던가.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ㅡ김광섭, '생의 감각' 중에서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는 관념적인 말은 손쉽다. 그러나 스님의 저 말씀은 내가 어떤 꽃인지를 더 생각하게 한다. 비교 말라는 행위의 준칙에 앞서 존재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나도 꽃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스님의 글은 유명하니 '무소유'를 비롯해 여럿을 읽었지만 이 책은 단번에 내게 내달아 온다. 기품 있는 옛날식 장정도 물론 좋았거니와 표지 색상과 질감이 똑 그분의 소박한 장삼 자락을 닮았다. 특히 스님의 필체로 '스스로 행복하라'시는데 그야말로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아닌가. 무수한 행복론을 읽어보아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 늘 어려운데 그 말씀에 답이 있었다.
'스스로 행복하라.'
인간이라고 불리는 우리 존재만이 아니라 동물, 곤충, 새들도 늙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 . 이것은 큰 괴로움과 불만족의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불만족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도 합니다. 존재의 한계를 알게 되면 진정한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출가를 꿈꾸는 그대에게' 중에서
이제 내 귀는 대숲을 스쳐 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혹은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충분하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가득 찼을 때보다도 더 충만하다.
-'텅 빈 충만' 중에서
훨훨 벗어 버린 나목(裸木)의 숲 속을 거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무들의 체온이 다가선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는데,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에서 도리어 따뜻함을 감촉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한테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 인간미를, 조촐하고 맑은 가난을 지니고 사는 사람한테서 훈훈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가난은 주어진 빈궁이 아니라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는 선택된 청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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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는 새로운 삶을 포기한 인생의 중고품이나 다름이 없다. 그의 혼은 이미 빛을 잃고 무디어진 것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끝없는 탐구이고 시도이며 실험이다. ... 올겨울은 히말라야를 찾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고 싶다. 내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가꾸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버리고 떠나기' 중에서
스님의 글은 어렵지 않다. 맑다. 산사(山寺)가 명쾌하고 맑아서인가.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후부터 스님이 남기신 법문도 유튜브로 찾아 듣게 되었는데 기승전결 완전한 말씀의 짜임도 놀랍다. 주제와 깊게 어우러지는 일화, 적재적소의 재치 있는 유머, 매끄럽게 진리가 일반화되는 과정. 법문도 얼마나 성실히 준비하셨는지 알 수 있다.
스님의 글만 만나도 인생의 많은 진리를 배울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선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실천은 어렵다. 스님의 오두막은 실천이다. 그런 분이 궁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지 가늠해 보노라면 인생에 대해 함부로 투덜대던 내가 머쓱해진다.
살기 힘들어지는 날. 이제는 스님의 말씀을 만난다. 그러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나'로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겠다고. 괜찮다고.
살아가는 힘을 주는 큰 말씀이 저토록 쉽고도 평범한 옷을 입고 책 안에 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내 허욕과 넘침을 조용히 벗어두고 싶어 진다. 그러면 어디선가 사그락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진리의 법의(法衣)가 스치는 소리, 그 소리가 내 세속에 내리는 것일까. 그러면 잠시 내 마음도 산사(山寺)가 된다.
- 무더위를 대하는 자세, 숨 쉬고 있는 존재의 기쁨, 단지 묵묵히 앉아 있는 시간의 소중함, 빙그레 하게 되는 '노후 대책법' 등을 약 20분 간 들을 수 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 머리맡에 켜 두고 말씀을 골라서 듣다 보면 백발백중 나는 스르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