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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Aug 24. 2023

미장원 풍경 유감

우리들_프레임에 대하여

전에 살던 동네 미장원. 부부 두 분이서 하신다. 입소문이 나서 단골로만 받는다. 스텝을 한 명 두고 하였으나 최저 임금이 오르면서 두 분이 하시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원장님은 손님께 싹싹하시다. 손님이 미용 의자에 앉고 원장님과 대화를 한다.

"언니.ㅇㅇㅇ 여행 잘 갔다 왔어예?"

"응. ㅇㅇㅇ이 프랑스 식민지여 가지고 안됐어."

"그랬구나."

"응. 식민지 되면 첫째, 유물을 가져간대. 우리도 일제 때 다 뺏겼잖아. 지금 일본 다 가 있잖아. 미국 그런 데로도. 참 아깝지."

오. 그러네. 유물을 가져 가지. 그게 첫째구나. 이분 문화사적  얘길 하시네.  더 들어 보자.

"둘째, 미인을 데려 간데."

음. 뭐 그럴 수 있겠다.

"셋째, 머리 좋은 남자들, "

"데려가는가?"

원장님, 패턴으로 반복되니 금방 학습하시고 말이 끝나기 전에 퍼뜩 되묻는 순발력을 발휘하신다.

"아니, 죽인데. 씨가 좋은 건 다 죽이뿐데."

"엄마야..."

"그래서 ㅇㅇㅇ에 지금은 2프로 모지리들만 있지. 결론적으로 너무 안됐더라. "

"그런가베. "

"그렇지. 가 보니까 너무 몬 사는 기라. 머리가 나쁘니까 산업이 없짢아. 시장에 뭐가 엄써."


옆자리에서 염색 손님 머리를 만지시던 남자 사장님. 우스워 죽을라 하신다.

"슬픈 일인데 와이래 우습노. 그람 나는 모지리로 남은 사람 씨가?"

"아이지. 우리나라는 다르지.  대 - 단하지. 그래도(이 말의 억양이 중요한데, 우리 지방 말의 독특한, '모지리로 남은'을 받는 거 같은, 그러니까 성조로 치면 낮은) 똑똑한 사람 많잖아."


이건 일본 제국주의가 똑똑한 남자를 앗아가고 남은 '모지리'들이 그래도 똑똑한 축에 속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 탄압에도 살아남은 똑똑한 남자들이 많단 말인지 헷갈린다. 사장님을 위로하려는 심산이었다면 후자일 것이다. 살아남은 똑똑한 남자들이 많다고 해야 사장님은 똑똑한 사람 씨가 될 가능성이 많다고 여겨지기 때문인가. 그래야 위로라는 의사소통 문맥에 맞겠지? 그런데 직감적으로 우리 지방 말의 억양 때문에 저 말이 전자로 들리는 건 나만이었을까. 어쨌든 사장님은 '모지리'들의 씨라는 얘기가 되는. ;;



"근데 나는 캄보디아는 꼭 가야 돼.  앙..앙..앙뚜와네뜨."

"아,..앙뚜와네트.."

그러고 보니 같은 '앙' 씨구나.;;

"그 사원은 꼭 가야 되거든. 참 좋타카데. 그라고 에도 시대 때 근친상간 많이 했잖아. 그래서 이빨 티 나오고 쪼매났잖아. 좀 생긴 게 그래 나오잖아. 일본 아~들이."

난 일본 사람들이 체구가 작은 편이란 건 알겠으나 다들 이가 튀어나왔는지는. ;;  그리고 체구가 작다는 것이 근친상간의 결과인지는. ;; 어찌 되었건 이제 일본으로 건너 가더니  일본의 성 문화를 설명하신다.

"일본에는 역 근처에 엄청 발달해 있어."

"뭐가예? "

19금이라 중계 방송은 요까지.




몇 개국을 넘나드는 스케일의 저 엄숙한 대화를 차마 깨지는 못하겠으니 표나지 않게 하려고 잡지를 뒤적이며 고개를 조아려 보았지만 힘들었다. 간신히 내 키득거림이 조금 사그라들자 한바탕 곤욕을 치렀는가 하는데... 뭔가 꺼림직하다. 너무 웃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냥 웃어도 되나 싶은.


그런가 할 나름의 논리가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 저 이야기 중에는 실제로 그런 것도 있고 그런지 아닌지 모호한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선 동족 간에도 크메르 루즈 시절에 안경 쓴 사람은 지식인이라 하여 몰살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안경 쓴 사람들은 지식인이다.'란 전제가 거짓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로 인해 유도되는 결론은 참이 될 수가 없는 건 당연하다.


조상 중 미인을 다 데려가면 후손은 박색만 남는가? 머리 좋은 남자를 다 죽이면? 모집단만큼 그런 일을 저지를 수도 없을 뿐더러 '머리 좋다'의 기준도 모호하다. 더구나 모계의 유전은 인정치도 않았으며, 유전적 발현은 랜덤이지 않은가. 그러니 실제로 ㅇㅇㅇ에서 저분이 말한 둘째, 셋째의 '데려감'과 '죽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로 남은 사람들은 '모지리'라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식민 사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식민지인은 못난 족속임을 주입시키던. 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바쿠후 시대는 의외로 통신사 같은 한일 교류의 문화를 중요시했고 평화를 지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동양의 대영제국을 꿈꾸고 천황제의 명분을 위해 '황국 사관'을 고안했다. 이로하여 '식민사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학계에 존재하는 기존 카르텔의 영향 때문이라고는 하나 유명한 우리나라 사학자가 그러한 류의 글을 백일하에 남것을 직접 읽었을 땐 참담했다.



양협(量狹)한 성질 : 산악, 협곡, 분지 등이 많아 .... 상호 배제, 시기, 질투 등....대동단결을 방해하는 사례가 많다.

천박한 현실주의 : 원대한 전망이나 계획보다도.... 미봉해 나가는 .... 위대한 종교가 생겨나지 못하고 미신적인 요소가 ....

꾸준한 노력과 근면의 부족성 : 용두사미 격의 것이 많이....  

사학자 이ㅇㅇ의 글에서 ,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 고대사', p 58 , 이희진.에서 재인용.



일본 사학자 호소이가 조선의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던 붕당朋黨을 '만나면 파당을 이루고 싸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당쟁'이란 용어(제도의 암과 명은 당연히 있겠지만 나도 '붕당'에 대해 잘 모르고서 '당쟁', '당파 싸움'이란 용어만 사용하고 살았다.), '조선인은 끈기가 없는 냄비 근성이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국민성이 일본을 못 따라간다.' 등등.





'사관'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이러한 프레임은 곳곳에 있다. 객관적이라고 하는 사진에서마저 프레임이 있지 않은가.


가끔씩, 그 시대 사람들이 저렇게 살았구나 하는 조선의 사진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의 '시선'을 알고 놀랬던 적이 있다. 여기에는 외국인을 위한 상품임을 증명하는 일본인 사진 업자의 표기 방식이 있다고 한다. 한 해 수백만 장이 넘게 생산되어 서구와 일본에 널리 퍼진 식민지 조선의 관광 엽서 사진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품이었다고 한다.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그들의 시선으로 소비된 것이겠. 이러한 것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 대한 시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으니.


사진 아래쪽 표기로 일본인 사진 업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역사e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ebs, 국사편찬위원회 공동기획)


일본은 이미지 정치의 힘을 알고 실력 있는 조선인 사진사를 없앴다 한다.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유독 왜소한 군주같이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 한다. 우리 모습을 찍었던 우리 지역 작가의 사진이 생각난다. 지난 시절, 곤궁한 모습이라 하여도 다른 시선이다.


일본이 발행한 조선의 사진 엽서. (출처: 위의 책)


고 최민식 작가의 사진.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찍은 그의 사진은 따뜻하다




 우리가 부당하게 겪는 이러한 류의 판단을 생각해 보면 '모지리'들만 남았다거나, 머리가 나쁘니까 산업이 없다거나 하는 말에 키득거리던 내 웃음도 000 나라 그들에겐 당연히 억울할 것이다. 또한 서구인들이 동양을 보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왜곡된 인식을 하는 '오리엔탈리즘'이라 하는 시선과 무엇이 다를까...... .


식민 사관의 피해자인 우리이기에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선 쉽지 않다. 저분이 말하는 '이빨 티 나온 일본인'은 합스부르크가의 턱 유전병과 같은 걸 말할 수도 있겠다만 이후 일본인의 외형이 열등함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 객관적이라 할 진... 생각없던 키득거림이 머쓱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중학교 때 인기가 많은 국사 선생님이 있었다. 불행히도 우리 반에는 그분의 수업이 없었다. 딱 한 번, 대강으로 들어오신 날. 젊은 국사 선생님의 기막힌 재담과 카리스마에 우리는 반했다. 역시 소문 대로구나. 신나는 수업을 해 주시더니 아이들을 숨도 못 쉬게 집중시켜 놓고 여태와는 다르게 목소리를 잔뜩 깔아 이렇게 수업을 마무리하셨다.

"해수면이 자꾸 높아진다고 하더군요. 일본, 빨리 물에 잠겨야 할 텐데."

까르르르르 터져 나오는 여중생들의 웃음소리. 저 문장이 아주 또록하게 기억난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전 이러한 변辯을 남겼다.

"동양 삼국의 평화를 바란다."

책임을 묻는 정의롭고 단호한 싸움과 저 수업의 발언은 다른 것 아닌지. 우리로선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증오'라는 것을 짐 진다는 것은 무거운 일이거늘 하물며 우스개로 넘길 것파멸에 기반한다면 씁쓸해지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날 엄청 짧게 머리를 잘랐다. 디자이너들은 항상 그런다.

"많이 안 잘랐어요~"  

그래, 여름은 톰보이도 괜찮지. ;;


며칠 후 나는 김훈의 '하얼빈'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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