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용둘님은 자그마한 키에 오동통한 몸매. 웃을 땐 눈망울이 쉼표를 딱 일정 각도로 빼뚤이 두 개 마주 보고 심어 놓으신 것만 같고, 걸을 땐 오동통이 무색하게 잘록한 허리가 좌로 우로 경쾌하게 넨넨 소리를 내며 싹싹 돌아가신다. 추울 때 외투 모자를 쓰고 저렇게 넨넨 싹싹 걸어가실라 치면 고깔 쓴 요정이 딱 저렇지 않을까... ....
출처 chuanong.tumblr.com
꼬마가 동네 빵집에 가서 곰보빵을 사려고 하니 주인 아저씨가 '곰보'(옛날에 마마 흉터로 얽은 얼굴을 하대하여 그리 불렀다.)이시라 죄송스러워 말을 못 하고 빵집을 나왔다. 집에 가서 '소보로 빵'을 엄청 연습했다. 담날 빵집에 다시 갔다.
"소보로 아저씨, 곰보빵 주세요."
친해지기 전 어느 한 날. 요가 마치고 차 한 잔하자고 갑자기 이야기가 나왔다. 아주머니들이 흔히 쓰는 '형님'이란 말을 잘 못쓰는 나는 어르신들 호칭을 요리조리 피해 가다 어느새다 '언니'로 부르게 되었다. 멀리 앞서가는 68세 용둘 언니를 75세 초코 언니가 큰 소리로 부르신다.
"용달아, 온나, 차 마시고 가자."
영차영차 작은 키로 열심히 앞서 걷던 몸을 호로록 돌려 이 언니 역시 큰 소리로
"저, 용달이 아입니더. 용 - 둘 -입니더."
'둘'에 방점을 확 찍어 답하신다.
용둘님을 부를 땐 '용달'이라는, 그러니까 '용달차'하는 그 '용달'이 생각나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던 거지. '용달'이 익숙하다 보니 '용둘'한다는 것이 불쑥 그 차가 입 밖으로 나오게 될 때가 많다.;; 빵집 주인 아저씨를 배려하느라 노력하다가 그 열심은 온데간데없고, 외려 안 할 말을 '팍' 찍어 해 버린 저 가엾은 꼬마 얘기가 생각 안날 수가 없다.
거리가 있다 보니 용둘 언니는 못 듣는다. 초코 언니가 날 보고
"엄마야, 우짜노 실수했따야."
그러는 사이 멀리서 용둘 언니의 우렁찬 대답이 날아온다.
"용-달-이는 우리 오빱니더!!!"
동사무소 앞에 뒤집어지는 언니들의 웃음소리.
"요새, 어린 아아들, 담배 피고 그라믄 하지 마라 캐야 되는데 참 세상 무서버. 그랬다가 '당신이 담배 사줬어?' 소리 듣고 우리 신랑이 놀래서 왔다니까."
한 언니 얘길 듣고 용둘 언니 말씀이
"하기사. 세상 무섭지. 그래도 가만 있기가 쫌 그라자나. 밖에서는 무서버서 그래 몬해도 나는 아파트 안에서는 쫌 힘이 나데. 그래 갖고 전에 아침에 나가는데 6동 앞에 거 길쭘한 의자 있제, 거게. 딱 보이 중학생이라. 이놈아들이 딸내미가 아들내미 무릎에 누버 가지고 참 못 보겠데.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지.
-야! 너거 학교 안 가고 뭐해!
그라니까 그 머슴아가
-오늘 일요일인데예.
우리는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라믄 일요일인지도 모르고 그랬으예? "
"아니, 알았지. 일요일 약속 있어서 나갔으니께. 근데 마 고새 까묵었지."
우리는 더 넘어간다.
"그라고 나니까 내가 뭔가 만회를 해야 되겠더라고. 그래서
-야. 너 이 아파트 살아?
-네.
-그람 몇 동 몇 호야, 어데- 마! 아파트에서.
그랬지"
"와, 그래도 착하네. 이 아파트 안 삽니다 하면 그만일 건데 사실대로 말하네."
"응. 그라더라고, 우쨌든
-몇 동 몇 호야!
그라니까 그 머슴아가 하는 말이
-우리 엄마 아빠가 그런 거 남한테 말하지 마라 했는데요. "
우린 이제 뒤로 넘어갈 데가 더 이상 없었으므로 앞으로 고꾸라져 배를 잡을 수밖에. 하기야 아무한테나 몇 동 몇 호 산다고 가르쳐 주면 안 된다고 아이 때부터 가르치니. 우리는 우스워 죽는데 용둘님은 그 특유의 쉼표 두 개를 올렸다 내렸다 이쪽으로 찍었다 저쪽으로 찍었다 하시며
'내가 억수로 무안했어. '
하는 표정만 지으니 이 요정의 사랑스러움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만 우리를 웃게 해 준다고 이 언니가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먹거리라도 낼라치면 항상 당신이 먼저 베풀려 하시고 누가 빠지지 않았나 늘 챙기신다. 먹고 나면 끝까지 남아 치우신다. 바닥 청소 당번 일인데 일이 있어 요가 못하는 날이어도 우렁 각시처럼 청소만 싸악 해놓고 가시고 없다. 날짜를 바꿔 드릴 수 있는데도 폐 끼친다고.
나이로 줄 세워 권위를 주장하는 것, 연세 들업네 하며 상스러운 소리 하시는 것 본 적이 없다. 며느리나 다른 사람들 얘기도 다 좋은 말씀만 하시고 안 좋은 말이라 해 보아야 웃자고 놀리는 정도로만 하시지. 68세 용둘 언니가 사랑스러운 것은 실상은 그런 이유라는 걸 오늘 이 글을 쓰면서 끄덕끄덕.
고 쉼표가 마주 보고 있는 두 눈은 그 연세에도 어찌 그리 귀여우실꼬. 요정은 숲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ㅡ사족
사실 아직도 우리끼리 있을 땐 용달님이 될 때가 많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용달님'을 '용둘님'으로 여러 번 고쳐야 했다. ;;;
복직하고는 우리 동네 새벽 요가 교실에 나가질 못한다. 얼마전 아파트를 산책하다가 용둘님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