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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Sep 27. 2023

그의 언어 감수성

사람과 언어

남편이 멀고 오랜 출장을 갔다.

"내 차 써, 나 없으니."

"당연한 걸 선심 쓰듯?"


그런데 나가고 싶은 맘이 없다. 출근도 지하철이 더 나으니 차를 끌고 직장에 가는 건 수레를 지고 가는 것처럼 생각만 해도 휜다, 등뼈가. 그렇게 남편이 가고 한 이 주나 지났을까. 지하 주차장도 한여름 온도와 습도가 싸움질이라도 하듯 서로의 기세로 맹렬하다. 코너를 돌면 기둥이 줄지어  A, B, C 주차 구역을 알리고 있지만 어디쯤 남편이 차를 대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출장 동안은 내가 몰 거라고 지하 1층에 두고 간다고는 하였으나 처분하기 전의 내 차를 늘 대던 장소에 놓아두면 좋으련만 그는 평소에도 그 자리엔 잘 대지 않았다. 또 저 멀리 어딘가 두었겠지. 팔을 길게 치켜올려 여기저기 어름으로 스마트키를 눌렀다. 어? 보통은 '뾱'하며 '네, 주인님.'하고 넙죽 절을 하듯 대령한다고 느껴지건만 대답이 없다. 이상하다. 기둥들 사이를 헤집고 다녀 본다.


차는 겨우 찾았으나 당황스럽다. 스마트키를 아무리 눌러도 꿈쩍을 안 한다. 아날로그 키가 스마트키 안에 있다고 하던데. 이리저리 눌러 보고 돌려 보고 해도 어디 숨었는지 모르겠다.  '0 차종 아날로그 키 찾는 법'. 본론만 가르쳐 주면 될 것을 유튜버는 늘 그렇듯 사설이 길다. 드디어 알긴 했는데 그래도 분해되지 않는다. 아, 이런. 어차피 서브 키가 있으니 열려고 고생 말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게 낫겠다만 고새 주차장의 더위에 지친다.


서브 키를 가져와도 차가 반응이 없다. 키 둘이 동시에 배터리가 나갔을 리는 없고 그럼 차의 배터리 방전이다. 내 차는 삼 주 이상 타지 않아도 이러질 않았는데...... . 보험사, 어디 보험이더라. 차 안에 보험 증권이 있으니 결국 아날로그 키가 필요하다. 다시 집으로 올라가 아까 본 영상대로 손톱이 짓찧이도록 열어봐도 안 되니 결국 커터 칼을 미세한 홈에 넣어 열었다. 이런 젠장, 매끈한 키 디자인 살린다고 이래 놓았나. 아서라, 0 자동차 너희들. 열어나 봤니. 욕이 한 바가지 출렁이고 넘친다만 품위를 생각하여 오만 푸념을 늘어 놓는 것으로 대신하다가 '이런 쓸 데 없는 잔소리를 왜 하니. 그들이 듣지도 않는데.' 더 덥구나 싶어진다.


다시 주차장으로 가서 아날로그 키를 꼽아 보기는 하였으나 이번에는 아무리 돌려도 안 열린다. 시커먼 스마트 키 속에서 무슨 보석처럼 찬란히 발견했다 했더니 이 녀석이 하릴없이 되었다. 아아... 날 잡아 잡숴 하는 이 시추에이션이란. 드디어 고상한 하 여사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단말마의 비속어를 뿜고 말았던 것이.


입에 맴도는 보험사 한 곳에 전화를 하니 가입되어 있지 않단다. 문이 열리지 않으니 할 수 없다. 남편을 깨워야 한다. 그곳은 지금 새벽 3시나 되었을까. 부스스 일어나 목소리가 잠긴 남편. 남편이 무슨 죄인가. 고새 더위를 잔뜩 잡수신 여사는 그러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툴투리 툴툴대고 늘 그렇듯이 남편은 유하다. 보험사에 연락을 하고 기다린다. 한여름만 아니었어도 보다 우아하게 대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사는 더위를 잡수셨다. 한 대접, 두 대접. 배가 부르게 잡수시고 이젠 주저 앉고만 싶다 하는데 노란 불빛이 지하 주차장을 밝히고 다가왔다.






'참 깨끗하네, 출동차가. 반짝반짝.'


뜬금없이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출동 기사는 내려서 인사한 후 차 보닛을 열고 충전을 해 준다. 다들 아시겠지만 차량 배터리 충전이란 얼마나 허무하게 끝나는가. 순간의 스파크가 번쩍 나고는 뭐 언제 내가 그랬나요 하고 시치미를 떼고 시동이 걸리는 차를 바라보아야 할 때, 그 일단의 겸연쩍음과 허망함이란. 예전에 스틱 차를 몰 때는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다니다가 차 두 대를 뽀뽀시킬 듯 해 놓고 충전도 직접 하고 그랬지.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이 스치는데 까닭 모르는 그는 멍하니 있는 꼴인 내게 말을 건다.


이번이 처음이냐, 처음이 아니면 새 배터리로 교체해야 할 수도 있다, 배터리 언제 갈았느냐, 얼마나 차를 안 썼느냐 등등. 당연한 질문이고 역시나 당연히 내가 아는 데까지 성심성의껏 답해준다마는 그래 봐야 남편 차이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주 정도 차를 안 썼다는 것 말곤 없고 '내 차는 오래 안 타도 이런 일 없었는데 뭐 이렇냐.'라는 둥 그에게 영양가 없는 말만 구시렁대고 있는 나. 저 더위 잡수셨다고라.


"사장님 차종이 뭐예요?"

엥? 지금 차 앞에서 보닛을 열어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나? 참 이상타, 이 사람.

"예? 이거잖아요."

차 앞의 로고를 가리키며 차종을 말한다.

"아니 사장님요."

"예?"

내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니 그는 고개를 한 번 힘주어 누르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본다. 나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 저 말씀인가요? '란 말을 눈 속에 심고서는 검지로 내 명치께를 가리킨다.

그렇게 무언의 대화가 순간 오가고.

"아..제 차요. 지금은 팔고 없죠. 남편 차랑 똑같아요. 남편은 RV. 저는 세단. 어쨌든 같은 차종이에요. 그 차는 거의 한 달 그냥 둬도 괜찮던데...... ."

복직하고 전철을 타고 다니느라 한 달 가량을 주차장에 대어 두다가 낭비라 생각되어 정든 차를 처분했기에 운행하지 않은 기간을 잘 알고 있다.

"아. 두 차종이 같은 밧데리 쓰는 것 맞아요. 그런데 그건 사장님 차 블랙박스가 주차할 땐 꺼지게 세팅돼서 그럴 거예요. 이 차는 블랙박스가 내내 돌아가니 밧데리가 다 나간 거죠."

"그렇군요. 그 차이가 엄청나네요."

"네. 이 차를 잘 안 쓰시면 블랙박스 코드 빼놓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리고 사장님. 잘 안 써도 한 번씩 시동 켜러 내려 오세요. 한 30분 정도 켜 두고 올라 가셔서 볼 일 보시다가 와서 끄시면 됩니다."

"네...... ."

"지금은 나가실 건가요. 아니시면 한 시간 정도는 시동을 켜 두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가 몰고 온 출동차가 떠났는데도 그 '반짝반짝'은 조도가 낮은 지하 주차장에 오래 머문다.  




출처 핀터레스트





그렇다. 그가 말한 '사장님'은 '나'였다.


다양한 업종이 있다 보니 천태만상의 '사장님'이 있겠지만 말 그대로 '큰 사업하는 사장님' 소리 정도 들을 수 있는 티가 나게 내가 요란히 차려입었느냐, 그래서 그도 내게 어떤 호칭을 쓸까 하다 그 말을 썼느냐,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면 티에 반바지, 뮬 슬리퍼, 바구니 가방 그리고 립스틱 정도 외엔 주로 늘 그런 노 메이크업. 물론 그러한 사장님도 분명히 계신다. 그러나 사업상 마주하는 관계가 아닌 고객과 직원으로 만났을 때 쓰는 '사장님'이란 용어는 단지 '호칭어'일 뿐이지 않은가? 특별히 내가 사업을 하는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질 계제는 아닌 게 분명한 맥락이었으니. 그런데 이 호칭은 상대가 남성일 때 주로 쓰는 말 아니었던가.  


우리 같은 여성들은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첨엔 아가씨, 그러다 새댁, 그러다 아줌마 혹은 사모님, 더 가면 어머님 소리를 듣는 게 세월에 따른 수순이다. 사장님(社長님)? 생각해 보니 사장님이란 단어엔 성(性)이 들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저러한 호칭으로서 '사장님'은 은연 중에 '남성'이라는 젠더 명사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전을 찾아 보았다.

사장 : 15. 社長. 회사의 책임자. 회사 업무의 최고 집행자로서 회사 대표의 권한을 지닌다.
         20. 師丈 혹은 師長. 스승이 되는 어른
사모 : 師母. 스승의 부인을 높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사부 : 師夫. 스승의 남편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내 주차장 경험의 용례에서  '사장님'은 직관적으로 15의 의미로 쓰인다고 생각된다. 20의 의미로 쓰인다 해도 이 말에는 성(性)이 없다. 그에 비해 '사모님'은 여성에게 쓰는 말이고 높여 부를 대상에 '연관된' 존재라는 의미이지 그 여성이 높여 부를 만한 내적 자질이 있느냐와는 구분되는 것 같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지위를 얻는 '사모님'에 비해 '사장님'이 말은 '독자적인 최고 권한자'로 인정하는, 즉 객체의 자질을 적극적으로 높이는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오랜 세월 의심 없이 들어왔던 고객이나 대화 상대방으로서 나와 남편의 호칭에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다. 저 출동 기사님이 '사장님'이라고 말했을 때 당연히 내 남편을 호칭하는 말이라 생각한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모르겠다. 요즘엔 출동차 기사님 교육할 때, 모든 고객에게 '남녀 성에 상관없이 다 사장님이라 칭하라.'라고 회사에서 하는지도. 어떠하든 생전 처음 이 호칭을 그로부터 듣는 나는 생각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의식 중에 남성 권력이 장악된 젠더 명사로 쓰고 있는 '사장님'이란 말에서 사회적으로 각인된 '젠더'를 무너뜨던 기사님 아닌가. 그가 남기고 간 '반짝반짝'은 출동차의 깜빡이라기보다 그의 언어 감수성이 켜 둔 깜빡이가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태순이를 키우다 보니 동물보호단체에 매달 소액 기부를 한다.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그 단체의 동영상이 늘 뜨는데 동물 학대 신고에 대한 내용이 주로 나오므로 고통스러워 잘 보진 않는다. 한 날은 입양인을 찾는 내용이라 잠시 시선을 두니 화면을 설명하는 말 중에 '고양이 한 명, 고양이 두 명' 이런 용어가 보인다. '명'이라? 내가 동물권을 그래도 생각하는 축인데 사람한테 붙이는 '명'을 동물에게 쓰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하였다.


태순이 증명사진



그런데 얼마 전 잡지를 뒤적이다  그 '명'이 그 '명'이 아닌 것을 알았다. 사람 수를 세는 명(名)이 아니라 목숨 '명(命)'. 그러니까 저 '고양이 한 명'은 고양이 사람 하나가 아니라 '고양이 한 목숨', 이런 의미였던 거다. 그러고 보니 참 좋지 않은가?  '마리'는 동물을 도축하여 세는 머리 수에서 나온 말이라 알려져 있으니 '마리'라고 칭할 때는 그들의 생명이 쉽게 여겨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고양이 한 '목숨'. 이렇게 말해 보면 고양이를 생명으로 받아들이고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난다. 일각에서는 그래서 동물에게 '명(命)'을 붙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명(命)'보다도 음절 수가 많아서 귀찮을지는 모르나 '목숨'이란 말을 단위로 써도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강아지 한 목숨. 고양이 두 목숨. 이렇게 부르면 쉽게 학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줄어 들까, '목숨'인데.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애완'이란 말보다 '반려'란 말을 쓸 때 동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이제 '반려'는 잘 정착되고 있다.




그의 '사장님'이나 고양이 한 '명' 혹은 한 '목숨'이란 말이 아남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언어 철학자가 말한 '언어 게임'의 그라운드에 이들이 등장하였다고 본다면 이것은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모르는 중에 편 가르고 대상을 가치절하하고 있음을 본다. 세상에는 권력의 편이 아닌 것이 없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공정한지, 바른지 질문하여야 하건만 쉽게 놓치고 살 뿐만 아니라 사고가 굳는다. 무의식이 다.


 내가 쓰는 언어가 내 의식을 드러낸다고 보면 한 마디가 조심스러워지고 혹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나 살펴보게 된다. 익숙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인다. 또한 잘 사용한 언어 하나가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희망도 생긴다.


남편은 여름이 다 가고서야 긴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는 새 배터리를 주문했고, 동안은 블랙박스 코드를 빼놓고 주차한다. 귀찮더라도 그날 출동 기사님이 '사장님'에게 권유한 대로 하는 것이  안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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