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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Sep 03. 2023

그 여름 나무 백일홍

직장에서 종일 누워 있었다. 조퇴를 할 힘도 없었다.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하고선 또 열심히 하는 나를 본다.





아침에 일어나 아직 여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출근길 내 발걸음을 지켜보는 것이 한 일과가 되었다. 그 '여름나무 백일홍' 꽃잎이 흩뿌려진 길을 걸어 직장엘 간다. 백일홍이 어디쯤, 얼마나 아직 남았나 바라보게 된다. 꽃이 나무 잎사귀 속에서 나긋나긋, 남겨진 잔치의 흔적을 여전히 수놓고 있는 걸 볼 때, 나는 또 안도한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ㅡ문학과지성사,1990


 




고통 속에 고개 들었을 때 만났던 꽃의 폭풍과도 같은, 질긴 붉음은 마치 내 절망 같다 여겨졌을 것이다. 어느 날 그 억센 꽃이 마당 가득 떨어졌을 때, 시인은 피를 보았을 것이다. 그간 내 고통의 피. 절망의 피. 그렇게 그해 여름, 내 그것도 꽃처럼 사라져 가는 삶의 어느 하루였겠다. 고통과 절망을 다 살아 낸.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 꽃이 가면 여름도 간다. 어쩌면 고통이어서, 절망이어서 꽃피는 것이 인생 아닌가.




소설가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에서 불씨 하나 없이 겨울을 견디던 하꼬방 시절을 회상했다. 없는 '살이'다 보니 온갖 쓰레기 살림살이를 주워 오는 친구가 난감했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가 주는 온기 때문에 올 때마다 받아 준다. 아니 오히려 좋다.

'...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신고가 들어갔나 보다. 경찰이 오고, 그때 친구가 말했다.

"우리 좀 잡아가요, 아저씨. 우리 도박했어요. 우리 좀 잡아가요."

누군가가 나도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청춘들이었다. '그해 겨울, 우리는 겨울이라는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소설가가 아프다.


정릉 산꼭대기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이 사실은 그에게 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은 당나라 시인 두보였다고 한다.



겨울,  간절히 봄을 기다렸건만 자신이 봄을 지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깨닫지 못했다고. 소설 당선금을 받아 기름보일러가 있는 곳으로 이삿짐 트럭을 타고 내려가면서, 그 언덕에서의 삶이 자신에겐 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청춘은 그렇게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져 버렸고 봄빛은 깎이었다고 했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

고통과 절망이 '장난' 치듯 억세게 붉은 꽃을 매달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장난'처럼 져 버리지 않는가. 말 그대로 '이 또한 지나가리'이다. 그런데 꽃이 가면 여름도 간다. 어쩌면 고통이어서, 절망이어서 꽃피는 것이 인생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잔치 끝 백일홍을 여전히 찾는 것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근길마다.


출근길 배롱나무, 그 여름나무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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