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볼 일 보러 나다닐 일이 있어 작은 가방으로 바꿨더니 어제 들었던 가방 속에서 미처 그것을 꺼내지 못한 모양.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갑자기 생각난다. 다행히 지갑은 있구나. 현금을 확인하고 티켓 자동판매기 앞으로 간다. 요즘은 큐알인가 승차권 방식도 바뀌었다고 하던데 이전 시스템과 다를 거라 여기니 벌써 긴장. 턱 되어 지하철 타러 열불 나게 나오니 이 모양이다. 내가 한글을 모르나 그림을 못 보나. 천천히 하면 따라갈 것도 시간이 없으니 마음이 번다하다.
구매 화면도 완전 바뀌었네. 순서대로 따라 해 봐도 안 된다. 차근차근 다시 하자.
'편도 1구간, 편도 2구간'
왜 이 말도 낯설지. 편도? 편도가 뭔가. 아. 한 번 가는 거. 반대말은 왕복도인가? 그럼 난 편도구나.
'1구간, 2구간'
모르겠고 일단 1구간 누른다.
'역명을 누르시오'
역 앞에 붙은 번호를 터치하니 안 된다. 네모난 칸이 나온다. 역 번호를 누르고 그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구나. 그럼 번호를 입력하시오라고 해야지. 다시 역 번호를 입력한다.
'000역, 1600원'
돈을 넣는다. 기계가 지폐를 빨아먹는다. 이건 많이 해 봤지. 자판기 쓸 때도 하고 전에 지하철 표 끊을 때도 했고. 그러면 잔돈이 알아서 나오는 시스템이니 뭐 2,000원 마구 넣어주마.
'찌지직'
표가 나온다. 카드식이다. 전에는 노란 딱지 같은 티켓이었는데. 90년대에 유럽 배낭여행 갔을 때, 파리 지하철이 우리랑 똑같은 티켓이어서 은근 반갑고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었지. 그 노란 딱지는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구나. 아니, 내가 이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그 사이 좌르락 잔돈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400원. 근데 돈 나오는 출구를 모르겠다. 구멍이 왜 이리 많지? 여러 번 본다. 제일 위 칸에 구멍이 4갠가 있는데 직감적으로 잔돈 출구는 젤 위 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맨 아래 칸을 훑는다. 아, 참, 내. 시간 없는데 왜 안 보이나. 사실, 400원이란 바쁘면 포기하고 그냥 가도 되는 돈인데 지금은 기필코 받아 가고 싶다. 이럴 때 400원은 왜 이리 크게 느껴지는가. 이곳저곳 쑤셔 대지 말고 한 방향으로 쭉 훑는 게 경제적이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위층에서 다음 층으로.
찾았다. 내 400 원아. 반갑다. 헉, 빨리 가자.
낯익은 이 매표기는 이제 철거될 것이다
지하철을 탔다. 정신없는 오늘은 그냥 눈 감고 음악을 듣는다. 코끝이 찡하네. 가사는 한 번 감정을 이입하면 고만 내 이야기 같거든. 내가 그러든가 말든가 기차는 출발하고 승객들은 각자 자기 출근의 정서를 가지고 오도마니들 앉아 간다.
내린다. 바로 앞에 한 여성이 간다. 이 역에선 좀처럼 만날 수 없는 형상이다. 그것은 옷차림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 그녀의 차림새랄 것 같으면,
신발, 키튼 힐의 뮬이다. 나도 키튼 힐을 좋아한다. 낮고 편한데 은근 섹시하거든. 색상은 베이지. 거의 자신의 피부색과 같다. 키 작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보호색이다. 하의는 허리에 7센티쯤 되는 굵은 고무줄이 든 쨍한 녹색 면 개더스커트. 발목까지 오는 길이다. 면(綿) 이 몇 수 정도 될까. 직장에 출근하려는 용도면 저보다 조금 더 두꺼워야 포멀한 느낌을 주는데. 어쨌든 저런 옷 편하다. 재킷은 아이보리 샤넬 풍 반팔 트위드. 요즘은 상의가 짧게 나오니 치마의 고무줄 부분이 가려지게 입으면 낫겠다. 가방은 명품 P사의 아이보리 토트백을 팔에 걸쳤다. 토트를 팔뚝에 잘못 걸치면 시장 가방 든 것 같아 신경을 좀 쓰는 게 좋지.
긴 머리는 틀어 올렸는데 이것이 무심히 세련미가 난다기보다는 강아지 꼬리가 '착'하고 달라붙은 것 같은 스타일이다. 결이 부드럽고 숱이 없는 염색 머리. 노랗게 물 빠진 부분이 드문드문하다. 어쨌든 칙칙한 무채색의 직장인들이 대부분인 이 역에서 그녀는 눈에 화악 띌 수밖에 없는 거란 말.
그렇게 바라보며 뒤따라 가고 있는데 그녀가 나만의 출근길, '홍해의 갈림길'로 접어든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가 먼저 가는 게 낫겠다. 그녀를 앞질러 빨리 걷는다.
연못.
오늘은 벙글어 있는 수련의 수가 늘었다. 첨 보는 것이 있네. '부들'이라는 게 이것이구나. 부들은 왠지 연못에 운치를 주잖아. 찍는다.
운치 있는 부들
빨리 가자. 지하철 표 끊는 통에 이럴 시간이 없다. 그러고 나오는데 연못 저쪽 옆에 누가 쭈그려 앉아 있다. 아까 그녀다!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운다는 시가 생각나는 딱 그 포즈인데 손엔 담배가 아니라 떡이 있는 것이 다를 뿐. 그것도 여자들이 흔히 치마를 입고 앉을 때 옷 뒷길을 한 번 손다림질하여 정리하고 앉는 방식이 아니라 철퍼덕 그냥 퍼질러 앉았다고 해야 하는 쭈그림으로.
그러고선 떡을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우물우물 씹고서는 연못을 한 번 본다. 시선은 떡으로 주지 않고 연못만 직선으로 응시하면서. 한 번 더 자동으로 떡은 그녀의 입으로 들어가고 또 자동으로 그 입은 우물거렸으며 역시 여자의 눈은 연못을 기계적으로 직선 응시하였다.
내 머리는 말한다. 빨리 가. 지각하겠어. 그런데 나는 얼어붙는다. 저 기괴한 풍경에.
이윽고 몸을 돌려 내 길을 가는데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래서 돌아본다. 그녀는 마치 떡이란 건 맛있어서 혹은 배고파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저렇게 우지끈 베어내어 질겅이는 대상이라는 듯, 여전히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그녀를 발견하였을 때, 묘하게 삐걱이긴 했지만 어쨌거나의 우아함은 온데간데없고 혼자 퍼질러 앉아 밥솥째 밥을 먹는 풍경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
방실이 '서울 탱고'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 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낯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가수 '방실이'의 노래, '서울 탱고'
한때, 시골 다방 레지가 꿈이었다. 이젠 레지를 할 군번이 아니니 마담이나 해야 하게 생겼다만.
술집도 하고 싶었다. '심야 식당' 같은 영화가 그것을 자극했겠지. 난 요리를 못하니 식당은 안 되겠고 술안주 정도는 하니까. 술집 주인장이 되어 세상사에 찌든 손님에게 한 잔 술을 따르고 그의 숙인 고개를 따뜻이 바라봐 주는 것. 좋지 않나?
그런 꿈을 말하니 남편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
"단, 한 가지는 알아. 당신이 원하는 손님만 오진 않는다는 것을."
그 말에 쨍그랑 나의 꿈은 깨어졌다. 그래. 내가 바라는 낭만적인 손님만 오지는 않겠구나. 흔히 '진상'이라는 사람들도 많겠구나. 현실은 그럴 거 같다. 난 늘 현실 감각이 없지... .
그런데 오늘 저 여인을 보니 술집 주인장의 꿈이 다시 살아 내 속에서 꿈틀댄다.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세상 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아. 그녀에게 술을 따르고 싶다. 이 노래처럼.
그러고 보니 먹고 사느라 불철주야 바쁘고, 별 것 아닌 지하철 표를 끊는 것도 새 기계라고 끙끙대던 나도 뭐 다를 바가 없다. 이 헐레벌떡이 가라앉고 나니 머리 아프게 고민하던 직장 일이 떠오른다. 직장이 다 그렇지, 툴툴 털어야지는 말뿐이고 나도 저 여자처럼 뭔가를 질겅이면서 하염없이 쭈그려 앉아 있고 싶은 건 똑같다는 말이다. 그런 내게 그냥 쉬었다 가라고, 세상 살이 온갖 시름 다 잊고 술이나 한잔하라고 말 건네는 방실이 같은 마음 두툼한 마담 언니가 그리워지는 오늘 같은 날.
그런데 오늘은 화요일. 씩씩대며 열나게 살았건만 고작 화요일이란 사실에 나는 절망의 울부짖음을 토해낸다. 오늘은 화요일. 고작 화요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