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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Sep 23. 2023

내게도 번아웃이 왔다 1_Vincent

내 일을 사랑했다. '최고'라는 말은 본디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 말은 제쳐 두고 내가 생각하는 온전한 상태가 될 때까지 결과물을 갈고닦아 내어 보이려 노력했고, 그것이 되는 순간 환희했고 보람 있었다. 내 생활의 90%는 일이었고 10%가 나머지였다. 이러면 대단한 일을 하는가 하겠는데 그렇진 않다는 게 좀 허무하긴 하다만. 평생 문자와 시름해야 하는 누구 말마따나 정신노동 소매상 정도 된다고나 할까.


근 삼십 년을 한결같이 그랬다고 하면 거짓말 같을 것이다. 지난 데이터를 우려먹는 따위를 하지 않았다. 항상 백지에서 출발했다. 그때에 가장 적확한 내용과 형식을 찾았고 어쩔 땐 '예술'이라는 것이 이런 쾌감일지도 모른다는 자뻑, 그것을 먹고 산 건지도 모르겠다. 승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 하는 일만 마르고 닳도록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에 그랬던 건지...


그날. 아주 맑고 약간은 여름의 후텁한 공기가 남아 있던, 불안스런 낌새는 하나도 없었으니 '릴케'보다는  '박두진'이 딱 어울리던 가을날이었다.




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사람들 앞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늘 익숙하던  공간이 갑자기 힘들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다른 아무런 변화도 없는 평상시와 같은 하루였다. '능금'이라 할 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마지막 여름 부스러기가 남아있는 태양의 것이었고 그것은 와그르르르 가을 하늘과 신나게 부딪는 소리를 내건만 나 혼자만 달랐다.


며칠 지나 그날의 제안을 위해 고흐 이야기를 가지고 와야 했다. 그의 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목구멍에서 따가운 밤톨이 소용돌이쳤다. 침 사래가 들린 듯 헛 켕김 소리를 두어 번 내면서 목구멍 깊숙이 이것을 욱여넣으려 애쓴다. 꿀꺽, 침을 삼키는 듯했지만 사실상 따갑고도 뜨거운 그 알갱이를 삼켜야 했다.


돈 맥클린이 노래한 그 구절


This  world was never meant for one as beautiful as you.  


이 대목이 흐를 때 눈물이 툭 떨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알았는지 그건 모르겠다. 그래도 할 얘기는 다 했던  같다.




고흐 같은 사람에게 이 세상은 무용이요, 고흐 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의미 없는 세상.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나는 그의 고독과 고통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마치 그가 내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은 듯.


삼십 년을 해왔건만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이렇게 발버둥치며 해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알기나 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10월 어느 날.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었다. 산에 가고 싶었다. 산에 가는 것은 연중행사 정도인 나이니 혼자 산을 오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산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혼자 산엘 올랐다. 따가운 볕을 이고 묵묵히 올랐다. 정상은 어림도 없으니 억새밭까지만. 억새가 솜털의 머리 다발을 흔들며 무리 지어 피었다. 오르는 중간에 남편과 통화하고 찍은 사진도 보낸다. 잘했다고, 산과 내가 있는 사진이 예쁘다고. 한결 즐거워졌다. 그럴 수 있지. 답답할 때가 있을 수 있지. 돌아오는데 뿌듯했다. 산은 포근하였고 가을도 깊게 붉어 있었으니.


숨이 안 쉬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심하게 느낀 것은 아니지만 뇌리에 '쩡'하고 박히던 순간이었으니까. 검색창을 띄우고 찾아본다.


 '공황'


이렇게 말하면 내가 공황 장애 초기를 겪었는가 하겠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니었다. 이후에 유사한 경험을 두어 번 더 겪었던 거 같다. 그러나 '아. 이런 게 공황이로구나.' 인식하고 견딜 만큼이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한두 번씩은 겪게 된다고 하고 그것이 다 병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처음 그 느낌은 두려웠다기보다 '나에게도 말로만 듣던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구나.'라는 낯설음이 더 컸다. 사람들이 이런 어려움을 겪으며 사는 거였구나.


급성 이석이 와서 MRI를 찍으러 기계에 들어갔을 때 '이러다 죽을 수 있겠구나.' 하고 목전에 닥친 죽음의 텃세를 만난 경험이 있었다. 기계의 문이 '쿵'하고 닫힐 때, 순간 공기가 뚝 끊겨 버린다. 몸과 연결되어 있던 나도 모르는 생명의 탯줄이 그 순간 싹둑 끊어지는 것이다. 텃세의 손아귀는 완강하게 내 목을 조여왔다.  


'어떡하지. 두드려야 하나. 저 관의 두께는 너무 철통이다. 그런다고 날 구해줄까. 저들이 내 호소를 알아차릴까. 여긴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인데.'


점차 견딜 수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급기야는 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애를 쓰니 산소가 더 사라지는 것 같은 공포가 몰려왔다.

"하은수 씨. 우리가 보고 있어요. 힘들면 그만할 테니까 조금 더 참고 심호흡을 봐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을 따라서 심호흡을 한다. 한-버-언, 두-버-언...... .  그러자 어디선가 산소가 들어왔다. 산소가 일으키는 바람이 솔솔 내 머리카락을 흔든다. 사는구나. 내가 사는구나.


지나고 보니 산소 운운을 보내 준 것도,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기계도 아니었다. 순전히 내 생각으로 이겨내었던 거다. 물론 '우리가 보고 있어요.' 하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결정적이었지만.


'폐소공포증'


그것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안다. 그것을 만났다. 어떠한 폐쇄된 곳도 아닌 대낮 천지 그냥 일상의 공간에서.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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