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흩어지는 거리에 도망치듯 멀어지는 네 뒷모습에..
쪼르르 졸졸..
요란하게 돌아가는 커피 머신에서 소리가 잦아들고 어두운 색의 물을 쏟아 낸다.
펑퍼짐한 카디건에 얇은 하의를 입은 그녀는 손가락까지 올라온 소매를 그냥 둔 채로 커피 머신에서 컵을 집어 들었다.
추운 날씨에 컵에서는 모락모락 하얀 연기가 탈출하듯 피어오른다.
홀짝 한입 마시고 나른한 오전을 깨우려는 듯 핸드폰을 들어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다 우울한 노래들을 모아놓은 목록을 선택했다. 마치 밖인 듯 하얗게 얼어붙어 쓸쓸하던 실내는 그녀의 나른함을 깨우려는 목적과 달리 우울한 노래 덕분에 음악이 나오기 이전의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 정도 일지라도 거의 매일을 타인과 격리되어 지내는 그녀에게는 어느 정도의 의미는 있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슬픔이 담긴 기타와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감정을 움직이게 만들어 준다.
입으로는 가만히 커피를 마시고 귀로는 공허한 슬픔을 맞이하며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녀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얼마나 가만히 있었을까.. 오늘 일정을 떠올려본다. 멍한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하며 머리로는 오늘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다.
3시 클라이언트 미팅..
5시 업계 사람과 식사..
그 후에는 별 다른 일정이 없다.
프리랜서로 전향한 지 3년째. 어느덧 꽤나 자리를 잡아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다. 어느 때는 너무 바쁘고 어느 때는 너무 한가한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살아남는 것에 대한 걱정이 없어진 셈이니 고민의 60%는 사라진 것이다. 가만히.. 나른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충분하다. 축복이다.
우웅~우웅~
평화를 깨우기라도 하듯이 모든 것이 조용하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인가?
한 손에 커피를 든 채로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든다.
- 오늘 저녁에 시간 돼?
- 할 말 있어
"할 말이 있어서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을까?" 이렇게 한 줄로 보낼 수는 없었나? 왜 메시지를 두 개로 나눠서 보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자친구다.
2년 전 클라이언트 측 몇몇과 술자리를 함께 하다가 그쪽의 친한 동생이라며 늦은 시간에 우연히 합류한 그는 술자리에서부터 노골적으로 호의를 표현했고 눈치를 챈 클라이언트도 잘해보라는 둥 하는 분위기였다. 딱히 호감이지도 비호감이지도 않았는데 그날 이후로 줄곧 연락해오던 그는 그 후로 한 달이 채 안되어 고백을 해 왔고 안달 난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연애한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요동치는 감정이 그리웠던 탓이기도 해서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정성을 다 해 왔다. 재미있고 솔직한 성격 탓에 같이 있는 시간은 즐거웠고 애정표현도 적극적으로 해 왔으며 적당한 매너에 다정하기도 했다.
1년 간은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다. 무엇을 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딱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진중하게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그때그때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성향이었던 그는 나와 비슷했고 어쩌다 하나의 진중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 나름의 논리로 적극적인 의견을 표하는 부분도 괜찮았다.
가끔 생각이 다른 부분이 생기면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은 약간 귀찮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좋게 보자면 그렇지만 전반적으로는 미숙한 사람이다.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약간은 이기적이고 무관심한 분야에는 철저히 무관심해서 가끔은 어이없기도 하는..
그런 미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최근 몇 개월은 이전처럼 같이 있는 시간이 온전하지는 않다.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가 꽤나 중요하고 바쁜 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처음만큼의 열정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패턴이었던 같다. 왜 상대들은 만난 지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다 되어갈 때 즈음엔 회사에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 시작하는 걸까? 전화와 메시지로는 세상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고 싶다는 둥 하다가 주말에는 피곤하기만 한 사람이 되고 다시 또 멀리 서는 사랑꾼이 되고..
반복이다.
그리고는 "나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같은 소리를 잘도 해댄다.
그녀는 애정표현을 잘하지 않는 편이다. 서툴지는 않지만 진심이 아니면 잘 내뱉지 않는 성향상.
잘하지 않는다. 나른한 하루가 좋은 날에는 남자 친구를 만나야 하는 게 너무 귀찮고 싫지만 싫은 내색은 하지 않는 대신에 "보고 싶어, 빨리 와" 같은 허울성의 메시지는 보내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 안 사랑해? 류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것도 지금 나이에 들어서는 익숙하다.
싸움으로 진행되지 않게 적당히 흘리는 법을 많이 알고 있다.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오늘 일정을 정리해 본다.
아까 그가 보낸 메시지 창이 닫히지 않는 채 제일 먼저 열렸다.
- 할 말 있어
갑자기 든 생각인데 이 메시지가 꽤나 어색하다. 이런 메시지를 그가 보내온 적이 있었던가?
처음 메시지를 받는 순간 들었던 이질감은 이 전에 받아보지 못한 내용이라서 그런가?
무언가 낯선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슬슬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하루종일 상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머리를 한번 흔들고 다 마신 커피잔을 들어 싱크대에 두었다.
가자! 시작이 반!
마음으로 외치고 외침과는 달리 느릿느릿 외출 준비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