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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Jul 29. 2023

만만하고 깨끗한

오래오래 소중하게 쓰임 받는 비법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것 역시 세월을 비켜 가진 못했다. 어느새 많이 낡아 볼품도 없다. 그래도 여전히 짱짱하다.


나이를 따져 보니 무려 서른여덟 살이 넘었는데 지금도 거의 매일 요긴하게 쓰인다. 사람으로 치면 100세가 넘은 나이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내가 부엌일을 할 때마다 꼭 쓰게 되는 그릇 한 쌍 이야기다. 속이 우묵하고 둥그런 모양이다. 옛날 어머니들이 쓰시던 바가지같이 투박하게 생겼다. 모나거나 날카로운 구석이 없고 양쪽에 손잡이도 있어서 쓰기가 편안하다. 게다가 딱 맞는 뚜껑까지 있다.


1984년에 미국에서 산 이 그릇은 그 당시 새로 개발된 고급 플라스틱 재질로 된 제품이었다. 이것 말고도 냉장고 용기로 나온 여러 모양의 통과 야외 도시락 등 구색 맞춰 꽤 많이 장만했었다. 다른 것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 없어졌는데, 이것만은 지금도 여전히 잘 쓰고 있다.


86년도에 귀국할 때 귀국 보따리 속에 넣어 가지고 왔고, 88년도에 큰 가방만 몇 개 싸 들고 미국에 다시 갈 때도 당장 아쉬운 대로 쓰려고 챙겨 넣었다. 공부를 다 마치고 귀국하던 93년도에는 이삿짐 컨테이너 속에 들어 있었다.  

    



결혼생활 40년 동안 나는 장, 단거리 이삿짐을 서른 번 넘게 싸고 풀었다. 처음엔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재미로 살았다. 점점 나이가 드니 잘 쓰지 않는 물건을 간추려 내는 게 집 정리의 관건이 되었다.

오랫동안 별러서 큰맘 먹고 장만한 엄청 비싼 본차이나 그릇 세트도, 장기 계획을 세워 하나씩 사서 모은 크리스털 제품들도 점점 귀찮아졌다.


너무 예뻐서, 혹은 비싼 것이라 아까워서 그저 바라만 보던 그릇일수록 쓸모가 적었다.  

내 손이 자주 가지 않는 물건은 가차 없이 처분해 버리게 되었다.    

 

너무 예쁘고 비싸서 함부로 쓰기 아까운 그릇


부엌에서든 밥상 위에서든 한 번도 주인공인 적 없는 이 낡은 그릇을 이렇게 오래도록 애지중지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하루에도 몇 번씩 휘뚜루마뚜루 쓰는 물건이라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두루 쓸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라 그런 모양이다.


쌀이나 채소를 씻을 땐 가벼워서 좋았다. 나물을 무쳐서는 그대로 뚜껑 덮어 냉장고에 넣으면 되었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부침개 반죽을 갤 때도 딱 좋았다.

국물 있는 음식을 담아 두기도 적당하고, 명절 끝에 나물을 다 넣고 양푼이 비빔밥을 해 먹을 때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다 보니 내 부엌에서 이것이 쓰이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쓰다 보니 늘 깨끗이 씻어 손 가까운 데 두게 되었다.


아무리 예쁘고 비싼 것이라도 먼지가 보얗게 앉아 있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데, 이것은 언제든 마음 놓고 꺼낼 수 있었다. 늘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아무 때나 쓰게 되고, 내가 즐겨 쓰는 것이니 버릴 까닭이 없었다.


자칫 잘못 떨어뜨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물론 금이 가거나 깨지지도 않았다. 손에 쏙 들어오는 모양에다 크기도 적당하고 가벼워서 어떤 경우에도 만만하게 쓸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이 그릇을 보면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2장 21, 22절 말씀이 떠올랐다.

‘큰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귀히 쓰는 그릇이 딱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릇을 감싸 쥐고 한참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도 이처럼 늘 깨끗하게 준비된 귀한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나이를 먹는 증거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관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생을 동경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이 성공적인 삶을 사는데 절대적인 요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비로소 철이 드는 모양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없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여일(如一)하게 자기 역할을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절대로 추레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단정한 모습이 되어간다.


굳이 말로 훈계하지 않아도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도 지녔다.

사는 동안엔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한 언덕이 되어주고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엔 그윽한 향기로 남는다.

   


그런 삶을 지향한다면, 항상 자기를 비우고 삶을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날마다 깊이 묵상하고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끝까지 주인의 손에 귀하게 쓰이는 그릇처럼 될 수 있다.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일도 아니다.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도 괜찮다.

날마다 작심(作心)을 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3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그런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보통 뚝심으론 어림도 없는 어려운 일이다. 

가장 제 맘대로 조정하기 힘든 것이 자기의 마음이니 말이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만만하고 깨끗해서 오래 쓰고 있는 나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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