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블라스 거리,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
람블라스 거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콜럼버스 동상이 있는 해안까지 이어진 보행자 전용도로다.
야외 카페와 레스토랑, 꽃집과 기념품 상점 등이 늘어서 있다. 거리 예술가들의 마임과 퍼포먼스도 종종 열리는 곳이다.
호텔을 나서기 전부터 가이드는 람블라스에 가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버스는 우리를 길 위에 내려놓고 멀리 사라졌다. 차 없는 길이니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1시간 후에 처음 내린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자유롭게 흩어졌다.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노점은 거의 다 닫혀 있고, 행위예술가도 거리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카페도 꽃집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만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다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아름답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북부 카탈루냐 지방에 있는, 우리나라의 부산 같은 항구도시다.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왔던 곳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중앙에 있는 광장은 다른 도시처럼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카탈루냐 광장’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싶은 카탈루냐 인들의 자존심을 담은 이름이라고 했다.
가우디는 1852년 6월 25일에 구리 세공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17세 때부터 건축을 공부하였다.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를 졸업하고, 학창 시절부터 비라르와 폰터스레 등의 조수로서 설계 활동에 참여하였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많은 건축물을 남긴 그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쇠약한 인간이며, 손상된 인간’이라고 믿었다.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말년에는 건축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것을 멀리하고 수도자처럼 살았다.
건축가로서의 가우디의 명성과 열정에다 독실한 신앙심이 결합하여 탄생한 작품이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다.
그가 지은 건물 중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은 모두 7개다.
그중에서도 구엘 저택과 밀라 주택,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꼽을 수 있는데, 성당은 아직도 짓는 중이다.
가우디는 1926년 6월 7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는 노면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당했다.
전차 운전사는 남루한 옷차림의 그를 노숙인으로 생각하고 그냥 길옆에 팽개치고 가버렸다. 사람들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택시를 잡았지만, 운전사는 지저분한 몰골의 그를 태우려고 하지 않았다.
세 번의 승차 거부 끝에 네 번째로 잡은 택시를 타고 겨우 병원으로 갔는데, 두 군데 병원에서 진료 거부를 당했다. 택시 운전사는 할 수 없이 빈민들을 위한 무상 병원에다 가우디를 놔두고 가버렸다.
병원에 방치되어 있던 가우디가 정신을 차리고 간호사에게 자기 이름을 밝혔다.
그제야 다들 경악하며 그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급히 연락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지들이 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하지만 가우디는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옷차림만 보고 판단하는 이들에게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게 하라. 그리고 난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낫다.
그는 끝끝내 빈민 병원에 남겠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고, 1926년 6월 10일에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치어 죽게 만든 전차 운전사는 파직되었고, 승차를 거부한 택시기사 3명도 불구속 입건되었다.
1926년 6월 13일, 그의 장례식은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평생 심혈을 기울여 짓던 성당의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가우디 성당 동쪽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 맞은편에 ‘수난의 파사드(Passion Facade)’가 있다.
가우디는 ‘수난의 파사드는 단단하고 벌거벗었으며 마치 뼈로 만든 것처럼 만들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표현한 이 파사드가 관람객에게 경외심과 고통, 공포를 상기시키기를 바랐다.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남긴 도면과 지침에 따라 1954년부터 수비라츠가 설계하고 건설했다.
가우디를 존경했던 수비라츠는 이 수난의 파사드를 완성한 후에 온갖 논란과 비난에 휩싸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욕을 먹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수의 모습도 논란이 되었다.
가우디가 직접 만든 ‘탄생의 파사드’는 그가 신의 선이라고 칭했던 곡선을 많이 사용하였다. 부조가 많고, 매우 사실적이며 화려하고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반면에, ‘수난의 파사드’는 가우디가 인간의 선이라고 했던 직선을 주로 사용했다. 조각의 형태는 단순화했고, 질감은 거칠게 표현했다.
수난의 파사드를 보는 순간, 나는 몬세라트 수도원에서 보았던 ‘성 조르디 조각상’을 떠올렸다.
수비라츠 특유의 직선과 음각으로 표현한 조각품에서 절제된 고통이 느껴졌다. 설명하기 힘든 강렬하고 큰 울림을 받았다.
특히 줄에 묶인 채 기둥에다 얼굴을 대고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내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났다. 남자의 온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배어 있다, 체념과 깊은 절망이 한데 섞인 표정이다.
나는 예수님 제자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생각하며 애통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닌가 보다. 이 조각품 제목은 ‘희롱당하는 예수님’이었다.
성당 내부에도 수비리츠의 작품으로 보이는 검은 성모마리아가 있다. 몬세라트 수도원의 블랙 마돈나와는 결이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이었다.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성가족성당에서 얼굴도 표정도 없는 그 작품이 가장 내 눈에 끌렸다. 제대 맞은편, 천장 가까운 높은 곳에서 검은 마리아상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따스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오후의 강한 햇살이 들어오니 순식간에 성당 안이 환상적으로 변한다.
이 성당은 동쪽과 서쪽이 완연히 다른 색감의 유리로 되어 있다. 조명을 설치한 것보다 훨씬 더 영롱하고 아름다운 빛이 온 세상에 가득하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게 정말 황홀했다.
예술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소리도 듣고, 자기만의 색깔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사람들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사는 게 고달프고, 뒤처져서 남의 뒤를 따라가면 인정받기 어렵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을 돌볼 새 없이 남루한 차림으로 일에만 몰두한 남자. 독실한 신앙으로 자신을 부축하며, 죽을힘을 다해 예술혼을 불태우던 가우디의 구도자 같은 삶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애달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