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를 그리며
6년째 같은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아침 6시 기상, 40분간 운동, 7시 40분 회사 도착. 모닝커피 장착 후, 8시 일과 시작. 출장만 아니면 그 전날 술을 마셨든 말든, 아침에 눈과 비가 오든 말든 매일 5분도 틀리지 않는 나의 루틴이다. 30년 직장 생활 내내 회사 문을 가장 먼저 열고 출근 도장 찍는 것도 포함된다.
'지겹도록 성실한 자'
딱히 남 보다 잘 나지 않은 내가 그래도 아이 공부시켰고 평균 보다 조금 나은 현재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은 '지겹도록 성실한'이란 탤런트 덕분일 것이다.
나의 성실함과 관찰력은 지금 다니고 있는 헬스장에서 여지없이 발휘되었다.
오랜 기간 같은 장소에서 운동을 하다 보니,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습성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 작은 체육장은 인간군상의 다양한 행동패턴을 관찰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실험장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체육장은 시내에 있는 평범한 곳이라, 회원들은 주로 근처 직장인과 상인들로, 이른 아침 시간대에 통상 3, 40여 명이 운동한다.
입장한다, 운동한다. 샤워한다. 퇴장한다
우리 호모사피엔스의 행동 디테일을 보자.
[체육장에 입장한다]
환복실 입구에 크게 써 붙여, 도저히 보지 못할 수 없는 "신발은 신발장에" 란 글씨를 꼬부랑글씨 아랍어 대하듯 버젓이 신발을 입구에 내팽기치며 입장하는 사람 - 선녀와 나무꾼의 나무꾼처럼, 내가 가끔 신발을 숨긴다. 미워서..
신발장 문이 꼭 닫히지 않아 신발장 전자자물쇠가 계속 삑삑 소리를 내는데도 그냥 입장하는 사람 - 저 무신경 정말 존경할 지경...
환복실을 환복만 하는 게 아니라, 인간 태초의 모습으로 활보하는 사람 - 여기 이름은 에덴의 동산 헬스클럽.
[운동한다]
트레이드밀에서 달리면서 팔을 좌우로 휘저으니 옆 트레이드밀 러너를 성가시게 하는 아저씨 - 아저씨 제 뺨 때리겠어요!
한 가지 기구를 독점하여 아저씨 - 제발 기구에 수건 걸어 놓지 마세요.. 빨래 줄이 아니랍니다.
헬스장의 본질인 프레스 벤치의 역기를 잡고 스트레칭하는 동네 할머니 - 할머니 아침잠이 없으신가 봐요
체육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는 체하는 체육관의 터줏대감인 근처 상인 아저씨 - 정말 성실하게 오시는데 말보다는 뱃살 빼기 집중
인사라곤 절대 안 하는 이상한 체육관 트레이너 - 손님도 아니고 정말 이상한 종업원이넹..
[샤워하기]
사우나안에서 아담의 본래 모습으로 대자로 누워있는 아저씨 - 제발 엎드려 누우세요
코로나 시절 자기 마스크를 사우나에서 말리는 아저씨 - 아저씨 자가 바이러스는 소중하게..
사우나 안에서 흘린 육수가 흠뻑 고여 있는데 그냥 나가는 아저씨 - 밥 말아 드시게 택배로 보내드립니다.
사우나 안에서 내가 타울 깔고 앉아 있는 것을 보여 주는데도 절대 맨 살로 앉아 있는 아저씨가 땀으로 남긴 인체의 자국 - 상상하지 맙시다.
샤워기 물을 맞으며, 양치하면서 앉았다 일어났다는 3가지 동작을 동시 무한 반복하는 아저씨 - 잇몸이 불쌍해요
체육 하는 공간에 얼굴 한번 내 비치지 않고, 사우나에서 열탕과 냉탕만 수없이 반복하여 하반신이 발갛게 물들어 있는 아저씨 - 왜 하반신만 하시지? 피부톤을 맞춰야 하는데...
체육관에서 체육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사우나 실에 있는 비치베드에서 잠 만 자는 아저씨 - 성실한 자여! 왜 굳이 여기서...
[퇴장하기]
파우더 실에서 타월로 머리를 닦고 그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는 아저씨보다는 젊은 분, 아니 넘 - 아 욧 ~~ 이소령의 쌍절권처럼 타월을 당겨서 뒷 머리를 치고 싶은 충동
'헤어드라어기는 본래의 목적에 사용합시다'라는 글자가 파우더실 선반에 붙어 있는데 드라어기에서 헤어를 맘대로 빼버리는 매우 창의적인 사람 - 기묘한 자세, 상상하지 맙시다.
운동 양말을 빨아서 신발장에 끼워 넌 정체 모를 분 - 에이! 하필 내 칸 바로 옆이넹..
그리고, 제일 신기한 건, 목욕장에서도 이어폰을 끼며 샤워하는 묘기를 부리는, 파우더 실 수건을 두고 가는 분 이자, 신발을 내 팽개치고 입장하는 분 - 3종 경기 우승자인 훌륭한 분 아니 넘...
[종합 우승자]
이 모든 것들 관찰하고 있는 이상한 아저씨 - 나 호모꼰대
그러고 보니, 상기 주인공들은 모두 아저씨다. 젊은 친구들 중에서 눈에 거슬리게 행동하는 이를 거의 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수록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그게 꼰대다.
꼰대의 뜻을 AI에게 물어보니,
'나이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 자기 경험을 일반화해 낡은 사고를 강요하는 사람. 자기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
한 공간에서 오랫동안 관찰한 인간의 같지만 아주 다른 행동 양식을 보면서, 과연 새로 창조된 생명 종인 Homo Conttes 호모꼰대스는 매우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이며, 틈만 나면 자기 멋대로 (좋게 말하면 개성대로) 행동하고 규율이란 틀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하물며, 이 제각각이고 제 멋대로인 존재들의 의지를 한 곳으로 모으고 중재해야 하는 소위 좋은 정치라는 것은 꼰대의 본성을 보면 그 자체로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절친과 가끔 다툴 때가 있다. 정치 이야기할 때다.
나 호모꼰대... 좋아하는 것은 바뀌지만 싫은 것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 친구 호모꼰대 역시 그러하다. 그걸 뻔히 알면서 얼굴 붉히고 목청 높여서 논쟁하고 나면, 항상 후회한다. 무득 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도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타고난 성실함에 평생 숫자를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나. 정확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나. 행동하고 생각하는 나.
그런 나는, 정확하지 않고 명료하지 않은 것을 참을 수 없고, 생각하다 행동을 머뭇거리는 것을 용서하지 못하며,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게으른 것을 경멸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성향이 꼰대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을 자각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어제 우연히 유튜브에게 듣게 된 고 이건희 회장의 말씀,
인간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정확함이 아니라, 편안함이다
뼈 때리는 말이었다. 나는 과연 편안한 존재인가? 상대방이 긴장하지 않도록 내게 빈 공간이 있었는가? 나는 왜 편안한 존재가 되지 못했는가?
성마르고, 까다로운 나의 타고난 성정도 한몫을 했겠지만, 어른이 되자, 나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했으리라. 강박은 몸과 마음의 여유를 앗아갔고, 한 발짝만 뒤로 물러 나면 구만리 낭떠러지 절대 공포만 남겼다. 나에게는 '돌격 앞으로'만 있었다. 그 속에 편안함은 존재할 수 없는 사치였다.
나의 성실함을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는 것
나와 다름을 이상한 것으로 보는 것
반대로 나의 이상함은 나 다움으로 이해하는 것
이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이성이고,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은 내 감성이다.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해도, 다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내려놓는 것'이 내가 타협할 수 있는 선이 아닐까? 그게 나 호모꼰대다.
며칠 전, 지인들과 골프를 하다가 문득 골프를 아주 잘하는 내 친구의 말이 떠 올랐다.
"우리는 볼을 앞으로 보내기 바빠 그린을 향해서 앞만 보고 가는데, 사실 골프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린 근처에서 뒤 돌아봤을 때의 풍경이다."
과연 그랬다. 그린 근처에서 뒤돌아 본 순간, 골프장은 단순히 운동하는 곳이 아니라, 사방이 온통 진홍빛 가을 단품으로 멋지게 물든 산이자 들이었고, 뉘엿 뉘엿 붉어지는 낙조와 어울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아니 장엄했다.
우리 꼰대들은 이제 그린 주변에 와 있다. 거기까지 고개 처 박고 무조건 땅만, 앞으로만 보고 달려왔다. 뒤돌아 보면, 우리 꼰대들이 걸어왔던 길이 가을 단풍과 노을이 빚어내는 화려한 채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처럼 얼마나 장엄한가...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 앞을 조심하면서도 뒤돌아 보고 주변을 살펴야 하는 길... 그게 '현명한 자' 란 의미인 진정한 호모사피엔스가 걷는 길이다. 나는 호모꼰대에서 호모사피엔스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