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가위, 바위, 보로 결정합시다

by 불지않는 면빨

"정상무, 잠깐 이야기할까?"

"네~ 곧 들어가겠습니다"


느낌이 확 왔다. 내 상사가 어떤 말을 할지.


나쁜 예감은 항상,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아. 알다시피, 영업, 생산 등 많은 부서에서 임원들이 퇴임하고 있어. 결국 내 직속 본부 상무 네 사람 중, 한 명은 내놔야 한데. 인사부에서는 여의치 않으면, 상무 네 사람 중 한 명을 가위, 바위, 보로 정하라네"


내 상사도 인사부의 제안이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씁쓸히 웃는다. 그리곤, 자기도 사표를 냈단다.


우리 회사 넘버 2의 자진 사표


이 한 문장이 회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도 이 상황에서 예외가 아님이 백 마디의 설득보다 강렬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위, 바위, 보로 내 운명을 결정해라고!!!


그랬다.

남들 눈에 나는 회사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외국계 회사 경험으로, 사람들은 나를 영어를 조금 하는 사람으로 인식했고, 회사가 영국 현지 법인을 인수하자 관리 담당 임원으로 발령 냈다.


가족과 영국에서 생활한 지 만 5년. 외국 생활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영국은 매력적인 나라였다. 아들은 생각보다 현지 학교에 잘 적응했고, 아내 역시 '시' 자로 시작되는 단어로부터의 해방을 즐겼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본사 복귀를 원했다. 날로 악화되고 있는 현지 사업 환경에 개인적으로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지 사업을 많이 지원해 줬던 본사마저도 실적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타 죽고, 너무 떨어져 있으면 얼어 죽는다는 넥타이 부대의 명심보감처럼, 본사 경영진으로부터 잊히기 십상인 해외 근무 임원의 처지에 더하여, 본사 사업마저 악화되고 있는 상황은 영원히 지구로 귀환할 수 없는 인공위성처럼, 본사로 정상적인 모양으로 복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빠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한다.


내 소망은 물거품이 되어, 결국 주재원 비자 최장 기간 만 5년을 정확히 채우고 2017년 3월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본사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재정적 어려움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해서, 채권 은행단이 회사를 직접 관리하는 체제로 전환하고 있었다.


회사 정상화 조치 1호로서, 임시직원의 줄임말인 임원의 80%를 퇴임시킨다는 루머에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바람을 등진 들불처럼 회사 전체를 휘몰아치고 있었다.


내 본사 복귀 타이밍은 불티가 아직 튀지 않은 해외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불길이 본사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던 국내로 자진해서 뛰어든 형국으로, 더 이상 나쁠 수 없이 최악이었다.




상사가 나를 포함한 본인 휘하의 4명의 임원들을 한 자리에 불렀다. 모두 예의 가위, 바위, 보 이벤트가 일어날까 긴장하며 앉았는데, 별 말이 없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동료들이 나를 보는 눈 빛이 모든 걸 말하는 듯했다. 아니, 나 스스로 그렇게 찔려했는지 모른다.


'당신은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고,

온갖 혜택을 받은 사람이 아니냐

굳이 가위, 바위, 보가 필요할까?'


며칠 뒤, 상사를 다시 찾았다.


부사장님! 제가 손을 들겠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그래도 날개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