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량도

by 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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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새벽


어둠이 옅어지는

이른 아침

하늘빛 바다와

바다빛 하늘이

지평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다


하늘 따라 붉은빛이

바다로 이어질 때

작은 배 물 위에서

발을 구른다


하늘빛이 고와서

바다 빛이 고와서

절로 몸이 흔들거리는

작은 배


고요한 선착장에

차분한 감동이

진하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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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도


밤 11시 50분. 어둠도 꾸벅 졸 시간. 어느 때보다 똘망한 눈으로 차에 오르고 있다. 내 성화에 못 이겨 이끌려온 영도 남쪽의 섬 여행이 설레는지 상기된 얼굴로 앞서 간다.


사당역에서 출발하여 새벽 4시 30분에 포교항방파제등대에 도착할 예정이다. 버스여행은 처음이라 네 시간 반을 버스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하고 힘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의자가 편안했다. 그동안의 삶에서 만들어진 많은 관념들은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실을 경험하면서, 미리 겁먹고 뒷걸음질 쳤던 일들을 반성하게 된다. 도전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눈만 감으면 잠들어버리는 영과 달리 잠들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등대길로 접어들어 바로 첫 모퉁이에 작은 텐트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코 고는 대찬 소리에 영과 서로 눈을 마주치며 소리 죽여 웃었다.


포교항방파제등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볼품없는 등대로 알려져 있다. 실용성만 선택하여 지어진 등대인 듯하다. 등대의 높이는 8m로 2006년 12월 5일에 처음 불을 밝혔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꺼지지 않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낚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등대호로 향하는 길의 양옆에 빼곡히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다가오는 신호들은 다양하다. 등대는 뚜렷한 목적을 위한 배들을 향해 신호를 보낸다. 항해하는 배들만이 그 빛을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신호들. 뚜렷한 신호임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 맞는 댓가와 결과가 따르게 마련인데도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결과가 나왔다면 그 결과를 초래한 과정과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한 가지의 이유가 아닌 총체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등대의 신호. 나는 어디에 등대를 세워두고 있는 걸까?


등대를 보고 내지항으로 가기 위해 용암포항으로 이동하였다. 7시 첫배를 기다리며 준비해 온 조식을 먹으라고 한다. 용암포항에 당연히 아침을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항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명판도 없는 허름한 식당이 하나 있었다. 라면, 어묵 등 아주 간단한 조리만 해주는 식당인 듯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만 켜져 있을 뿐 인기척이 없다. 둥근 탁자와 네모난 탁자가 각 하나씩 놓여있고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다. 라면을 먹을 수 있냐는 물음에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여자분이 된다며 나오신다. 웃음기 없고 메마른 표정의 냉랭한 말투, 강단 있어 보이는 60대 중반쯤의 어르신이다. 우리는 라면을 시켰다. 깨끗이 치워지지 않은, 누군가 앉았다 간 듯한 테이블에 앉아 셀프정돈을 하고 라면이 나오길 기다렸다. 우리가 들어온 후로 3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라면을 찾는 손님들에게 컵라면만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만 노랑 냄비 라면이 제공되었다. 이것을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웃음이 났다. 꼬들꼬들 라면은 맛있었다. 라면과 함께 나온 깍두기를 먹었더니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맛이라 뱉어내고 말았다. 라면은 맛있으니 만족. 라면을 다 먹고 승선 시간이 남아 좀 앉아 있어도 되겠냐고 여쭈어봤더니 올 손님도 없으니 그리하라고 하신다. 아마도 그동안 손님이 없었던 모양이다. 여담을 나누며 앉아 있는데 손님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주인어른은 손님을 받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불친절하고 성의 없이 손님을 대했다. 주인어른의 모습이 특이해 관찰하게 된다. 뭔가에 많이 지쳐있는 듯 무심하고, 뭔가에 화가 잔뜩 나있는데 참고 있어서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모습이다. 내 눈에 비친 어르신의 모습은 불행해 보인다. 눈빛도 서늘하다. 사람의 모습이 가장 불행해 보일 때는 어떤 때일까? 분노에 차 있을 때, 거만할 때, 그보다 더한 건 사랑이 없을 때이다. 마음에 사랑을 베풀 상대가 없을 때 사람은 가장 불행해 보인다.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행복한 일이다.


작은 가게에서 나오니 일출이 어둠을 서서히 흡수하고 있었다. 검은 능선 위로 연한 다홍빛. 그 위로 날개를 활짝 핀 하얀 구름이 날듯이 어려 있고 몽글몽글 여러 모양의 아기구름도 떠있다. 작은 배 여러 척이 무심히 떠서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아침을 맞는다. 하늘이 맑은걸 보니 오늘 날씨는 내 마음속에서 합격이다. 서서히 밝아오는 항구의 새벽은 로맨틱하게 정겨웠다. 떠오르는 해의 기운을 받아 붉게 달아오른 새벽하늘에 반하여 카메라를 들이댄다. 첫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관광목적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아침을 여는 항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 위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고성 용암포항 풍양호 선착장에서 첫배인 7시 사량카페리호를 타고 내지항으로 출발하였다. 배 안의 널찍한 바닥에 앉아 보고 싶어서 들어갔다가 바닥이 따뜻하여 누워버렸다. 잠이 부족해서일까? 잠들고 싶다. 꾹 참고 갑판에 나와 보니 해가 솟아오르는 중이다. 해돋이는 언제 봐도 감동이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윤슬을 호흡으로 들이 킨다. 더할 나위 없이 충전되었다.


통영에 있는 사량도는 섬인데도 불구하고 등산을 목적으로 찾는 등산객이 대부분이다. 산과 바다를 함께 볼 수 있는 풍경이 그만큼 독보적이다. 사량도라는 명칭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산세가 뱀 같아 보이고, 실제로도 뱀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후 30~40년 전부터 뱀과 천적인 산돼지가 서식하면서 뱀이 사라졌고, 현재는 산돼지로 인해 농작물의 피해가 잦아 농민들이 애를 먹고 있다.


내지항에서 내려 사량도 산행이 시작되었다. 사량도는 상도 하도가 있는데 우리는 상도만 산행하면서 경치를 즐길 예정이다.

산행여정은 내지항 - 지리산 정상 - 불모산 - 가마봉 - 옥녀봉 - 금평항으로 하산하여 가오치항으로 이동,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게 된다. 가마봉에서 옥녀봉으로 가는 출렁다리가 가장 인기 있는 구간이란다.


지리산은 산청 지리산이 보이는 산이라 하여 '지리망산'이라 불리다가 현재는 지리산이라 불린다. 지리산 가는 길의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져 산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목은 늘 설렌다.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충돌하는 때다. 시작이 설레고 긴장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작은 삶에 생동감을 준다. 10분쯤 올랐을까? 안개가 조금만 더 걷히면 너무 좋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지금 자체로도 너무 멋진 풍경에 난 저절로 웃음이 났다. 뚜렷하게 구별되는 산등성이와 미세하게 다른 색을 띠고 있는 안개에 의한 빛깔이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저 멀리 섬이 보인다. 왼쪽 작은 섬이 농가도, 그 뒤 오른쪽이 수우도다. 소의 형상이 있어 수우도라 한다. 동백나무가 많은 특징이 있다.


지리산은 암릉이 많아서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오를 수 있다. 위험한 구간이 있어 긴장이 되기도 했다. 섬 산행은 가볍다는 얘길 귀동냥으로 들어서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걱정 없이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오산이었다. 힘들다. 숨이 차고 목이 타고 덥다. 그러다가도 경치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산과 바다가 같은 색이다. 파란 하늘에 걸친 구름도 예쁘고, 파란 바다를 물거품을 내며 지나는 배들도 어여쁘다.


바위를 타고 재밌게 가고 있는데 함께 온 영이 갑자기 허벅지에 쥐가 났다. 돌발 상황이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다가 괜찮다고 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에 대한 무지로 우리는 대처를 잘하지 못해 중간에 주저앉아 버렸다. 산행 시에는 위급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구급약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인데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돌발 상황에 대한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이 정도 섬 산행은 어렵지 않게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의 체력이 된다고 자만하였다. 바위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데, 지나가던 등산객이 다가왔다. 고맙게도 파스를 뿌려주고 근육 이완제와 아스피린을 주었다.

"근육이완제는 씹어 먹어야 효과가 빨리 나타나니까 씹어서 드세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멋짐 빵빵 풍기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너무 고마운 분이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이 선행받음을 가슴에 잘 보관했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나타나면 그대로 전해줘야겠다. 선행이 돌고 돌아 그 고마운 분께 전해지도록...

산행 시 상비약 : 뿌리는 파스, 아스피린, 근육이완제


열심히 다리를 주무르고 10분쯤 후에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근육이 풀려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영은 속이 메스꺼워 힘들어하고 있는데 철없는 나는 경치에 빠져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영의 상태를 보고 산에서의 몸의 경직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좀 흘러야 몸이 온전해진다는 것도 인식하게 되었다. 휴식을 좀 취한 뒤 몸의 긴장이 풀리고 다시 출발이다.


출렁다리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경은 찰나처럼 보고 지나쳐야 했다. 아쉽다. 쥐가 나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호젓이 경관을 바라볼 시간이 없어 안타까웠다. 서둘러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장소로 가야 한다. 가마봉에서 옥녀봉으로 가는 길은 기절초풍할 정도의 경사가 진 계단이 있다. 너무 가팔라 내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치 호랑이를 피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옛날이야기의 소녀처럼 부들부들 떨며 계단을 내려가 옥녀봉에 도착했다.


우찌 이런 계단이....


옥녀봉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옛적에 사량도에 어부남편과 마음씨 고운 아내가 어여쁜 딸 옥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남편은 정성을 다해 딸을 키웠다. 옥녀는 아름답게 성장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 너무 외로웠던 아버지는 딸에게 욕정을 느꼈고, 그 욕정을 참지 못해 딸을 범하려 했다. 온 힘을 다해 뿌리쳤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딸은 아버지가 마음을 고쳐먹길 바라며 뒷산 바위 벼랑으로 소가죽을 쓰고 황소울음을 울으며 짐승처럼 올라오면, 자신도 짐승처럼 아버지를 맞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황소울음소리가 들렸다. 옥녀는 슬픔을 안고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부터 옥녀가 스스로 몸을 던진 벼랑은 옥녀봉이 되었고 옥녀가 떨어져 죽은 곳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리면 그녀가 흘린 피 때문인지 붉은 이끼가 낀다고 한다. 또한 사량도에서는 대례를 치르지 못하고 죽은 옥녀를 위해 지금까지도 혼례식 때 대례를 치르지 않는다. 비극적인 전설이 내려오는 옥녀봉은 지금도 돌탑이 쌓여 있어서 이 전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그녀의 넋을 위로하는 의미로 묵념이나 절을 하고 간다고 한다.


옥녀봉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가오치항에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였다. 차를 한잔할 정도의 여유시간이 되어 차를 마시며 바다를 향해 앉았다. 늦은 하산과 영의 뱃속 상황이 일렁여 식사를 하지 못하고 음료로 대신했다. 싱싱한 해산물 낚지, 멍게, 해삼 등등 먹기로 했었는데.... 밥이 보고 싶다. 영은 운동 부족이라며 앞으로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다음에 다리 힘을 길러서 사량도에 다시 오자고 바다를 보며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힘들었을 텐데 잘 이겨내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저 멀리 여객선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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