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로우 Jun 12. 2023

내 안에 없는 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난 왜 명랑한 그 아이가 불편했을까.

내 안에 없는 건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 데미안     

    



대학교 시절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친구가 있었다.

기숙사 한 층을 자기 동네처럼 휘젓고 다녔다.

누구를 만나도 거리낌 없이 ‘야 안녕!’하며 인사를 했고 

나이가 가장 많은 교수님한테도 ‘교수님 밥 좀 사주세요~’라며 자연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여러 명이서 기숙사에 모여 밥을 먹을 때도 친구들의 의견을 물어보기보다 ‘난 짬뽕!’이라며

메뉴를 먼저 척척 정했다.

특유의 친화력 때문에 선배들이랑 친해졌으며 자연스럽게 학생회 일을 참여하기도 했다.

언니, 오빠들에게 점심, 술을 곧잘 얻어먹고 다녔으며 

심리학과 1학년을 대변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1학기가 지날 무렵

왠지 모르게 그 아이가 점점 불편해졌고, 나를 지키기 위해 서서히 걔와 멀어지는 걸 택했다.

당시에는 ‘그냥 나대는 게 싫어서’,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태도가 싫어서’라는 단순한 이유였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자유분방한 모습이,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거는 친화력이, 인간관계에서 방어막이 없는 명랑한 모습이, 쉽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담대함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천진난만함, 자유로움, 인간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이끌고 싶은 마음, 나대고 싶은 욕심을 그 아이가 건드렸고, 

억누른 내 모습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싫은 감정’을 내고 그 아이‘탓’으로 공을 넘겨 버렸다.  


“내 안에 없는 건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아이의 어린 시절, 골목대장처럼 동네를 휘졌고 다녔을 때 선뜻 따라줬던 아이들의 인심이,

낯선 상황에 긴장하여 주위를 탐색하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먼저 말했을 때 괜찮았던 환경이, 

나이와 직급에 관계없이 사람들 동등하게 대했을 때 상처받지 않았던 경험이     

그냥 ‘질투가 나고 부러웠던 것'이다.     

그런 경험들 속에서 명랑하고 당당했던 그 아이의 태도가 얄미웠던 것이다.


질투라는 감정은 참으로 인정하기 힘들어서, 그 모습을 ‘혐오, 싫은 마음’으로 둔갑해 

그저 ‘미워해버리는 마음’으로 덮어버리곤 한다.

그게 더 쉽고 편하니까. 

내 안에 그 사람의 불편한 모습으로 투사된 상처를 보는 게 더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사실 내 안에는 마음껏 내 의견을 말했을 때 ‘그건 아니야!’ 라며 수용받지 못했던 경험이, 

나이 많은 어른을 자유로운 태도로 대했을 때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라며 꾸중받았던 경험이,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만만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던 아픈 경험이,

그 아이의 천진함 속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질투가 나고 부러웠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 아이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학창 시절 열심히 쌓아온 경험 정보를 바탕으로

레이더를 돌려서 탐지하고, 피하고 미워했었다.


무의식 정화(내면 아이 치유) 작업을 하면서 알게 됐다.

내 깊은 무의식 저편에 숨어있던

사람을 대할 때 상처받을까 겁내기보다 호기심의 표현을 먼저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사람을 너무 좋아하지만 천진난만한 호기심을 내비쳤을 때 

무시당할까 봐 만만하게 볼까 봐 꾹 눌러 담았던 ‘마음껏 나대고 싶은’ 아이가,

친구의 선호에 따르기 전에 먼저 솔직한 욕구를 말하고 싶은

소박한 당당함을 누르고 있는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슬프면 울고 아프면 같이 있어줬다.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온전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갇혀있던 무의식 속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본래의 빛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 몸에 아픈 에너지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던 아이들을 하나씩 만나자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움과 무엇으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해방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왜 이러지?’, ‘남들은 자유롭게 쉽게 하는데 난 왜 이렇게 망설이지?’ 라며

비교하며 자책하고 자괴감에 빠졌던 순간들,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들에 

잠재의식 속 숨어있던 그 아이는 말하고 있었다. 


“그냥 날 알아차리고 너의 몸을 빌려 표현할 수 있게 해 줘. 그럼 비교 없이 너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어”라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난 못생겨도 괜찮아, 뚱뚱해도 매력 있어’라는 

영혼을 속이는 정신 승리 형식의 일시적인 위로가 아니라

‘못생기고 뚱뚱한 나는, 돈이 부족한 내가 괜찮지 않아.’ ‘이런 내가 싫어! 아파! 나도 사랑받고 싶어!’라는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란 것.


그 밑에 숨겨진 그 당시에는 어려서 감당하기 벅차고 누군가 알려주지 않아서 풀어내지 못했던 슬픔, 두려움, 불안 등을 마음껏 표현하고 알아주면 된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을 알고 가슴으로 깨닫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을 돌아왔다.      


그제야 나도 ‘어떤 모습의 나’도 스스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조건이나 성취를 이뤄서가 아닌

부자가 되거나 예뻐져서도 친구가 많아서도 아닌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해 줄 수 있다는 한 모금의 자유를 얻고 있다.

 

거창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고 일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의 어떤 모습에서 불편함을

느끼는지 탐색해 보는 것.

그것이 내면 아이를 만나는 첫 시작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여전히 방황하고 넘어지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켜켜이 쌓여있는 해묵은 감정을 비워내고 또 채우고 다시 비워내고 있다.


거창하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나의 감정이 신호를 보내는 불편한 시점을

알아차려는 노력 한 줌.

그 한 줌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심 어린 기대를 하면서.

     

내 안에 없는 건 밖에서 보이지 않기에,

내 안에 자기 수용을 가득 채우면 어떤 이의 모습도 다 괜찮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란 

진심 어린 기대를 하면서.


어떤 모습의 '나'도 선뜻 꺼내어 볼 수 있는 용기


작가의 이전글 유교걸이 자유롭게 레깅스를 입기까지 : 무의식 탐구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