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커피숍의 티파니 블루 문 너머로
쓴 커피는 어른의 음료라 생각했다. IMF 시절 대학에 들어가 자판기에서 처음 마신 믹스커피는 달콤하면서도 어른의 씁쓸함이 스며있었다.
학과 건물 1층 코너에 있던 자판기 커피는 새내기 시절 쌀쌀했던 가을부터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과제물을 만들던 추운 겨울 새벽녘까지 온몸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고마운 음료였다. 1층 코너의 자판기 앞 계단은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은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처음 원두커피를 접했을 때가 첫 직장을 갖고부터였다. 직장인 시절, 남자 선배들뿐인 부서에서 나는 담배 타임 대신 커피 타임을 택했다. 사수가 내민 쓴 커피에 서서히 중독되었다. 어느새 헤이즐넛 한 스푼과 블루마운틴 세 스푼을 섞어 마시는 취미가 생겼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생활에서 멀리 시선을 둘 수 있는 시간, 다채로운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향기로운 커피가 주는 친애하는 시간을 즐겼다.
결혼 후 육아기가 끝난 나는 이제 묵직한 여운이 있고 강렬한 쓴맛과 끝은 고소한 향을 느낄 수 있는 커피를 즐긴다. 커피가 주는 각성과 명료해지는 산뜻한 느낌이 좋다. 그리고 이곳, 동네 커피숍에서 진한 바디감의 쓴맛과 고소한 향이 어우러진 커피를 만났다. 아파트 단지 상가 한편, 오래된 티파니 블루 색 나무문이 있다.
커피 관련 다수의 자격증을 보유한 커피 볶는 사장님이 계시는 동네 커피숍이다. 손님이 뜸한 늦은 저녁 시간에 정성스레 커피 원두를 볶는 곳이다. 빨간 로스팅 기계에 연결된 스테인리스 환기관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차갑게 느껴지는 물건이다.
아파트 단지 내 팔백여 세대와 칠백여 세대 사이에 자리한 이곳은 부동산 공간을 반으로 나눠 벽을 세운 뒤 출입문을 따라 일자형으로 구성한 작은 카페다. 양쪽 벽면 중 한 곳은 2인용 나무 테이블이 3개 있고 1미터도 안 되는 통로를 사이에 두고 주방이 있다.
좁은 통로를 지나면 작은 다락이 나타난다. 그곳은 아늑한 아지트이자 유년 시절 다락방의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이다. 몇 해는 다락의 좌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눈길만 주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공간. 유년 시절 다락방을 흠모하던 시간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시선의 높이와 다락방이 주는 비밀스러운 안락함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곧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느낌이 드는 곳, 다락은 내게는 그런 공간이다. 그래서인가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달뜬 기분을 들게 한다.
다락 아래에는 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이 작은 카페에서 가장 여유로운 자리다. 알전구를 기본 조명으로 사용하는데 입구 쪽은 백색 전구로 되어 있다. 좁은 공간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어 화이트 벽면에 그려진 카페 외관 삽화가 눈에 잘 들어온다. 안쪽 테이블 공간은 노란색의 작은 알전구를 곳곳에 배치해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 곳이다.
출입문과 나란한 위치에 가로로 긴 형태의 나무 프레임의 아웃스윙 오닝 창문이 있다. 가을이면 열려있어 단지 내 상가를 오가다 보면 은은한 커피 향을 느낄 수 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세련된 조명과 화려한 인테리어와 달리, 이곳은 세월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시장의 빠른 변화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동네 어귀의 오래된 나무처럼 시간을 품은 공간이다. 낯익은 풍경이 품어주는 온기와 편안함도 한몫하리라. 이곳에서만큼은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고, 마음은 온전히 고요해진다.
나의 손길을 재촉하던 세탁 음도, 시선을 집요하게 잡아끄는 집안일도 없다. 갑작스럽게 처리해야 할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휴대전화만 내려놓으면,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지배하던 수많은 역할에서 해방될 수 있다. 오롯이 좋아하는 커피와 나만이 남는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길든 짧든 성능 좋은 고속충전기처럼 방전된 마음을 채워준다. 커피의 묵직한 향기가 든든함을 더해주며, 입맛에 꼭 맞는 커피 한 잔의 충만함은 뿌듯함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인근에 있어 아이들의 등교 후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이기도 하다. 나 또한 간간이 만나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과의 인연을 돌아보면 함께하는 시간이 내 심리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킨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문득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의 소설 《비밀의 화원》에 등장하는 세 아이가 떠오른다.
《소공녀》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녀는, 비밀의 화원에서 버려진 정원을 배경으로 메리, 콜린, 디콘이 각자의 고립감과 약점을, 서로를 통해 치유하며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려냈다. 마치 그들이 정원에서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듯, 이곳에서 만난 지인들은 자녀 교육부터 노후 준비까지,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같은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우리는 함께 웃고 유머로 상황을 넘기며 해결책을 찾는다.
마치 《비밀의 화원》 속 아이들이 서로의 아픔을 보듬듯,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의 편협함을 깨뜨리고 삶의 균형을 잡게 했다. 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너무 몰입되어 좁아졌던 시야가 트인다. 함께 나누는 대화는 정원에 핀 꽃처럼 조용히 마음에 스민다.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삶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나 또한 익히게 된다. 때로는 지인의 한숨이 주인공 콜린의 병약한 숨소리처럼 들리다가도, 함께한 대화 끝에 웃음소리로 바뀌는 순간이 좋다. 커피 한 잔과 함께라면, 메리가 비밀의 화원을 발견한 것처럼 평범한 일상에서도 새로움이 피어난다.
책 속에서 붉은가슴울새가 메리에게 비밀의 화원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듯, 일상의 작은 틈새에 찾아오는 이곳은 쉼과 새로운 통찰력, 여유로움을 선사하는 소중한 공간이다. 오랜 세월 마주했지만, 느슨한 유대감으로 연결된 사장님은 간단한 인사와 맛있는 커피로 혼자만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나무 테이블과 의자, 그 위에 놓인 패브릭 쿠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쓰고 묵직한 커피의 고소한 뒷맛이 있는 곳이다. 오늘도 나는 커피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친애하는 시간을 갖는다.
* <비밀의 화원>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대표작인 이 소설은 황량한 저택과 버려진 정원을 배경으로, 상처받은 이들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내면의 어둠을 극복하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고전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