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은 못 먹었지만
몇 해 전, 큰아이가 중학생이던 때의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 남짓 지났을 무렵, 아이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뜻밖의 말을 건넸다.
“엄마, 이번 학교 숙제가 뭔지 알아? 벚꽃 사진 찍어서 제출하기래.”
그 무렵 집 앞에는 매화꽃과 진달래, 목련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봄은 그저 ‘졸음과 싸워야 하는 계절’ 일뿐이었다.
밤 10시가 넘어서야 학원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새벽까지 숙제를 이어가는 빡빡한 일상.
홀로 집을 지키며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볼 때마다, 이 예쁜 순간을 가족과 함께 나누지 못하는 현실이 늘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숙제'라는 명목으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선생님 덕분에 우리 가족 다 같이 꽃구경 한 번 가보자!"
사실 내게는 비장의 카드가 하나 더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꽃구경 후 아이의 기운을 북돋아 줄 달콤한 간식 계획이었다.
그 벚꽃길 근처에는 갓 구운 호떡 위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듬뿍 올려주는 유명한 '호떡맘' 카페가 있다.
사진을 얼른 찍고 가족들과 마주 앉아 그 달콤한 호떡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하며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하지만 나의 의욕은 가족의 컨디션도, 현장의 상황도 앞질러 가버렸다.
평일 낮, 내가 혼자 한적하게 거닐며 만끽했던 그 여유로운 꽃길은 온데간데없었다.
금요일 밤에 그곳은 벚꽃 물결보다 사람 물결이 더 넘실대는 인산인해였다.
게다가 야심 차게 계획했던 '호떡맘' 앞은 이미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 줄로 가득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남편과 북적이는 인파에 기운이 쭉 빠진 아이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대기 줄 끝에 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달콤한 보상으로 아이를 달래주려던 나의 계획은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사진을 어떻게 찍어..."
아쉬워하는 아이의 혼잣말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다행히 가족들은 내 미안한 마음을 알아주듯 묵묵히 동행해 주었다. 비록 기대했던 '호떡맘'의 달콤한 호떡은 먹지 못했지만, 인파 속에서도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가족사진을 남겼다.
아이는 가만히 멈춰 서서 가로등 조명을 받은 밤 벚꽃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 이쁘다~
엄마, 우리 예전에 벚꽃 잎 받기 했잖아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소원 빌면 이루어진다고"
아이는 그날 밤, 조명 아래서 나름의 정성을 담아 직접 찍은 벚꽃 사진을 숙제로 제출했다.
화려한 명소의 풍경이나 달콤한 간식보다도, 긴 하루 끝에 마주한 그 찰나의 반짝임이 아이에겐 더 소중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봐도 그 숙제를 내주신 선생님의 마음씀이 참 감사하다.
만약 그 숙제가 아니었다면, 사춘기의 아이들과 그해 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 채 각자의 방과 거실에서 무미건조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꽃을 보라는 숙제는, 사실 곁에 있는 사람과 잠시 숨을 고르라는 쉼표 같은 선물이었다.
그해 봄밤, 우리 가족은 그 쉼표 안에 잠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