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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Oct 06. 2022

장애인과 성소수자

 희미한 비명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고 싶었지만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고개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남자가 미친 듯이 무지개 색 깃발을 흔들다 이내 깃을 접었다. 그리고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대더니 환자가 생겼으니 당장 구급차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서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한 남성을 볼 수 있었다. 몸에 무지개를 그린 그는 입가에 검붉은 피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그러나 바리게이트 건너편에 ‘에이즈는 물러가라!’라고 쓴 피켓을 든 여자는 신이 너희를 벌한 것이라며 그들을 비웃었다. 나는 119에 문자를 보내려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지금 광화문 시위장에서 한……’ 문장을 완성시키지 못했는데 옆에 있던 예지가 휴대전화의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저런 건 도와줄 필요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고개만 끄덕인 채 피를 토하는 남성을 가만히 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비명소리를 끝낸 건 마침내 찾아온 앰뷸런스였다.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은 앰뷸런스를 향해 피켓과 쓰레기 등을 던져댔다. 흥분한 그들은 서로를 밀어대기 시작했고 그 탓에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멀리 던져졌다. 이내 차마 밑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짓밟았다. 다시 휴대전화를 주웠을 땐 이미 액정이 다 깨져 푸른 화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시위는 뜨거운 햇빛이 저물고서야 막을 내렸다. 나는 부서진 휴대전화를 들고 예지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수화를 건넸지만 그녀는 저녁 예배를 드리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나는 그녀를 태운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들겼다. 뒤를 돌아보니 깡마른 남자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부서진 내 휴대전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새로 바꿔야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저리 가달라는 말 대신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내 팔을 덥석 잡더니 나를 끌고 사거리에 있는 휴대폰 매장을 향했다. 나는 짧은 신음소리를 내며 저항했지만 남자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그때, 낮에 봤던 수염 난 남자가 깡마른 남자 앞을 가로막았다. 깡마른 남자는 그의 두꺼운 팔을 보곤 곧장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깊은 한 숨을 내쉬더니 내 팔을 놓고 사과 한 마디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장으로 돌아갔다.

 수염 난 남자가 나를 보더니 괜찮은지 묻는 수화를 건넸다. 나는 그의 정확한 손동작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액정이 박살난 내 휴대전화로 향했다. 그는 전화를 빌려준다며 내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주었다. 나는 환하게 지은 그의 표정을 보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에게 답장이 왔다. 그녀는 데리러 갈 테니 광화문 역 앞 할리스 커피점에서 한 시간만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남자에게 보답으로 커피를 살 테니 같이 카페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시위로 인해 잔뜩 막힌 도로가 한 눈에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 각자 창밖만 바라보았다. 이 정적을 깬 건 그의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벨소리였다. 액정 위로 떠오른 이름을 보니 그의 직장 상사였다. 그는 잠시만요, 라고 양해를 구한 뒤 입으로 손을 가려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 들리는 소리는 그의 큰 손으로도 방음이 되지 않았다. 듣자하니 그가 이번에 시위에 간 것을 거래처에서 알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걸 계기로 거래가 파기되었고 회사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받았다. 덕분에 남자는 해고를 통보받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절로 인상이 찌푸렸다. 고작 이런 걸로 해고를 통보하다니. 나는 그를 위로해줘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전화를 끊고 다시 미소를 짓는 그에게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온 고함소리에 놀란 우리는 동시에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푸른 정장을 입은 남자의 다리에 매달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장 남자는 그녀에게 오 만원 지폐를 던져주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그의 다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가방에서 문서 한 장을 꺼내더니 한 판만 더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문서를 보자 남자는 음흉한 웃음을 보이더니 여자를 일으켜 주었다. 나와 수염 남자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의 눈을 마주치자 문득, 남자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나는 가방 안에 장애복지센터에서 받은 공고 문서를 건넸다. 그리고 여기서 일 할 생각 없는지 묻는 수화를 했다. 남자는 종이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입 꼬리를 올렸다. ‘언제부터 나오면 될까요?’ 처음이었다. 수화가 이렇게 우아하게 느껴진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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