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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Feb 24. 2024

눈을 감아도 가려지지 않는 냄새

김시오 창작소설



  이따금씩 저 혼자만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는 그 순간이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 때였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근심과 걱정도 날 지배할 수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느라 다 터버린 손은 나를 쓰다듬을 때마다 따가웠지만 날 잠재우기 충분했고, 구부정한 허리는 내 몸에 딱 맞게 포근했다.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의 품에 안겨 낮잠을 즐기곤 했다.

  늘 공허하게 텅 비어있던 엄마의 눈동자도 나를 품에 안았을 때만큼은 부드러웠다. 엄마도 날 품에 안았을 때, 엄마만의 세계가 열렸을 것이었다. 그때 한 번이라도 엄마의 세계에 들어가 볼 걸 그랬다.


  눈동자


  엄마는 공장에서 일했다. 여덟 남매 중 첫째였던 그녀는 대학에 들어가기보단 일찍이 돈 버는 일을 택했다.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엄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일이 일찍 끝나도, 야근을 해야 할 때도, 월급이 들어와도 언제나 그들의 눈동자는 한결같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인간은 기계를 대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엄마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해고장을 받아 공장을 떠났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썩은 동태 눈깔을 잃지 않았다. 엄마는 아직 젊다는 이유로 해고장을 받지 않았지만 그녀의 썩은 동태 눈깔에도 불안함을 감출 순 없었다.


  어느 날, 공장 앞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시위를 벌이는 진 몰랐지만 분명 모두 화가 잔뜩 난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목청을 높이는 대학생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엄마와 나이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보이는 청년들은 그녀와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유일하게 하나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은 화가 나도, 억울한 일이 있어도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생의 눈동자만큼은 뜨겁고, 강렬했다. 그 대열 중 중심이 있었던 남자, 그는 혁명을 일으킬 듯한 눈빛으로 시위대를 이끌었다. 목소리도 쩌렁쩌렁했고, 그 누구보다 눈빛이 뜨거웠다. 엄마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저 남자만큼은 차갑고, 썩은 엄마의 인생에 혁명을 일으켜줄 것 같다고.


  결혼을 하고서도 엄마의 눈동자는 여전히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아빠도 집에 있을 때면 엄마의 눈을 닮아갔다.

  ‘부부는 서로 닮는다잖니.’

  나는 그 말을 싫어했다. 새하얀 도화지는 물감을 물들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엄마를 닮아가는 건 아빠였다. 하지만 아빠도 간혹 가다 다시 혁명적인 눈을 할 때가 있었다. 아빠가 그런 눈을 할 때면 새벽에 집을 들어오거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설 때였다. 엄마도 아빠의 혁명을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엄마는 지쳐갔다. 엄마가 지쳐갈수록 날 안고 잠에 드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단지, 내가 나이가 들어서란 이유는 아니었다.

  아빠의 눈동자는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갈 때, 혁명적으로 변했다. 참다 못 한 엄마는 아빠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빠는 불타는 눈동자로 한마디도 지지 않고 엄마의 말을 반박했다. 그때, 엄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썩은 동태 눈깔을 한 채 그저 뻔뻔한 아빠를…… 지긋이 바라 볼뿐이었다.


  “넌 엄마처럼 살지 마. 아빠처럼 살아야 해. ”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말이었다. 결국 엄마는 나를 아빠에게 보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 여겼기에 난 엄마의 말을 따랐다. 아빠는 내게 새엄마를 소개하며 이제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빠는 아직까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빠를 따라 이사를 간 곳은 특이했다. 높은 건물들이 곳곳에 지어져 있었고, 길바닥엔 쓰레기 하나 놓여있지 않았다. 나는 그런 동네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넌 눈빛이 참 날카로워. ”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 사귄 친구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다. 나는 가족관계를 꾸역꾸역 숨기며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이 웃으면 웃었고, 인상을 찌푸리면 나도 따라 찌푸렸고, 슬픈 표정을 하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가면 덕분에 학교 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반 친구들은 나를 따랐다. 눈빛이 날카롭다고, 할 말은 할 줄 아는 애라고 그들은 나를 무리의 리더로 삼았다. 나도 중심에 있는 걸 즐겼다. 하루는 말 끝마다 ’ 세끼들아’를 붙이는 수학 선생을 교육청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그는 ‘세끼들아’ 대신 ‘학생들아’를 붙였다. 나는 그때 확실한 승리감을 느꼈다.

  ‘내가 이겼다. ’

  

  고등학교 삼 학년이 되고선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펜을 잡기 시작했다. 나는 잡은 펜으로 숫자나 영어를 끄적이기보단 글자를 적어 내렸다. 글을 쓰는 동안은 내 세계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세상에 흠뻑 빠지기 충분한 정도였다. 다른 친구들이 수시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동안 나는 문예창작 실기를 보러 다녔다. 주어진 제시어를 주제로 콩트를 만들거나, 한 문장을 이어서 다음 벌어질 콩트를 쓰는 건데 빈번히 내게 날아온 건 불합격 통지서였다. 선생님은 내 글에 너무 내 주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학마다 추구하는 방향이 있으니 그거에 맞춰가야 합격을 할 수 있다고.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노력했지만 막상 제시어를 보면 내 세상이 펼쳐졌다. 결국 난 문예창작 진학에 실패했다.

  “그동안 한 게 너무 아깝다.”

  친구들은 내게 재수를 권했지만 이 짓을 또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친구들은 하나둘씩 대학이 있는 지역으로 떠났고, 남은 나는 홀로 남겨졌다. 이따금씩 외로움이 살결을 간질일 때마다 엄마가 동태 눈깔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물


  “넌 엄마처럼 살지 마. 아빠처럼 살아야 해.”

  사실 엄마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언제나 동태눈깔을 한 채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 엄마. 난 그 모습이 답답하고, 싫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눈을 동태 눈깔처럼 하고 싶지 않아 늘 눈에 힘을 주고 다녔다.


  친구들이 대학이 있는 지역으로 흩어지기 전, 우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우리가 언제 또 모이겠어. ”

  서로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졸업식이 끝나고 단 한 명도 가족과의 외식을 가지 않았다. 이런 레스토랑에 자주 온 친구는 처음 접시에 샐러드를 잔뜩 담았다.

  “원래 이런 곳에 오면 샐러드를 먼저 먹어줘야 해. 그래야 안 물리고 많이 먹을 수 있어. “

  나는 그녀를 따라 접시에 샐러드를 담았다. 그리고 다음 접시를 담을 때도 그녀를 따라 접시를 채웠다. 접시를 여러 번 비우고, 마지막 후식 접시를 채울 때 그녀는 이곳이 파인애플 맛집이라며 파인애플을 잔뜩 담았다. 후식 역시 그녀의 접시를 따라 담았다. 난생처음 먹는 파인애플이었다. 파인애플을 한 입 베어 물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입 안이 달콤하면서 새콤했고, 나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거렸다. 그날, 파인애플을 메인 음식보다 더 많이 먹은 듯했다.


  친구들이 흩어지고, 아르바이트라도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에 알바공고 앱을 깔았다. 여러 아르바이트들이 화면에 떠올랐지만, 유독 한 공고가 눈에 띄었다. 며칠 전, 아이들과 먹은 패밀리 레스토랑. 나는 스크롤을 더 내리지 않고 곧장 그 패밀리 레스토랑에 지원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 맛있는 파인애플을 잔뜩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면접은 1차와 2차로 나뉘어 보았다. 처음 1차는 매니저와, 마지막 2차는 패밀리 레스토랑 점주와 면접을 보는 형식이었다. 매니저는 내게 펜을 하나 쥐어주더니 이 펜을 본인에게 팔아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식은땀이 거푸 흘렀지만 뒤에 놓인 파인애플이 내게 응원을 해주는 듯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매니저에게 펜을 팔았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 질문을 하지 않고 다음 2차 일정을 설명해 주었다. 2차 점주와 보는 면접은 더 당황스럽고, 황당한 걸 시킬 것 같아 거울을 보고 연습하고, 대본도 썼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점주는 내게 학교와 가족관계, 남자친구 유무만 물어보고 다음 주에 보자고 했다.


  첫 출근 날 내 사수를 맡은 아르바이트생은 기껏해야 나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였다. 그녀는 내게 지정된 락커 위치를 알려주었고, 일할 때 입을 새 유니폼을 꺼내주었다. 새카만 유니폼 위에는 명찰이 있었다. 아직 내 명찰이 만들어지지 않아 퇴사자가 쓴 명찰 위에 내 이름을 테이프로 덧붙였다.

  “한 달 정도 일 하시면 명찰 나오실 거예요. 일단 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오시면 돼요. “

  유니폼은 총 세 가지 색깔로 구분되었다. 얼마 안 된 시급제 직원들은 검은색, 시니어급 직원들은 짙은 갈색, 매니저는 회색. 점주는 매니저와 같은 회색 유니폼을 입었지만 그 위에 세련된 앞치마를 했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았다. 며칠 전 친구들과 식사를 왔을 때, 주문을 받고, 노래를 불러준 직원과 똑같아 보였다.

  “다 갈아입으셨으면 저 따라오세요. ”

  처음 사수가 데려간 곳은 설거지장이었다. 그 안에선 한 사람이 빠르게 접시를 닦고,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저기 보이는 앞접시를 닦는 게 신입 직원이 할 일이에요. 접시를 다 닦으면 카트 위에 있는 설거지거리들을 여기 선반 위에 정리해서 놓으시면 돼요.”

  홀 밖으로 나가 주문을 받고, 서빙하는 건 신입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면접을 잘 봤더라도 이 과정은 필히 거쳐야 한다고 했다. 나는 묵묵히 앞접시를 닦고, 음식물 쓰레기를 손에 묻혀가며 식기를 정리했다.

  “신입이에요? ”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물었다. 처음 주고받는 사적 대화에 나는 볼멘소리만 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전 홀 사람이 아니고 주방 사람이라 불편해하지 않아도 돼요.”

  “아……”

  “오늘 첫 출근이에요? ”

  “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도망가요.”

  그가 속삭이듯 입가에 손을 얹고 말했다. 나는 그의 묘한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네까짓 게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야. ’

  그의 눈빛에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까짓 거, 내가 끝까지 버텨준다.


  첫 월급은 나름 괜찮았다. 아직 수습 기간임이었음에도 나쁘지 않은 금액이라 생각했다.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숫자를 헤아렸다. 몇 달만 일하면 아빠한테서 벗어날 수 있겠다. 하루빨리 이 집을 떠야겠다.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다짐한 목표였다.

  사수였던 여자는 월급제 직원으로 돌렸고, 곧장 시니어 급으로 승진했다. 그녀는 락커 거울 앞에서 한참 동안 짙은 갈색 유니폼을 입은 자신에 심취해 있었다.

  “이제 자리 하나 비었을 테니 홀 나가도 되겠네요. 다음 주부터 나갈 테니 미리 공부하고 와요.”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었다. 거기엔 손님 응대법, 음식 설명, 컴플레인 시 대응사항 등 매뉴얼들이 적혀 있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한 아르바이트였는데 매뉴얼만 종이 다섯 장을 차지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도 그 매뉴얼을 틈틈이 읽고, 외웠다. 거울을 보고 연습하기도 했다.

  처음 홀로 나가기 전 날, 자기 전까지도 매뉴얼을 떠올리고 읊었다. 그리고 홀로 들어갔을 때, 찹스테이크를 토마호크 스테이크로 잘못 누르는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매니저는 화가 잔뜩 난 손님 테이블로 가 허리를 연신 숙여댔고, 사수는 나를 락커로 불러 한참 동안 혼냈다. 그 뒤로 매니저가 처음이니 그럴 수 있지 않냐고 했지만 그녀는 아량곳 않고 눈초리를 주었다.

  “오, 벌써 주문받는 거예요? 많이 컸네.”

  설거지를 하던 남자가 말했다. 담배를 피우고 왔는지 그의 유니폼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괜히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분노를 가다듬었다.

  “노닥거리지 말고 나가서 접시나 치우고 와요.”

  사수는 여전히 내가 불만인 듯했다. 홀에서도 내게 비싼 스테이크를 주문하려는 손님이 보이면 곧장 주문을 가로챘다. 그러고선 마감 때 내게 실적이 왜 이 모양이냐며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내가 하루빨리 퇴사하길 바라는 듯했다. 그 행동에 나는 더 굳게 다짐했다. 저년을 꼭 짓누르겠다고.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말없이 티브이만 보았다. 그런 아빠를 뒤로 하고 현관을 나왔다. 마지막 순간, 아빠는 엄마처럼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아빠의 새 아내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진 보지 않았다. 어차피 내겐 남이었으니까.


  어떤 목적


  어느새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을 한 지 이 년이 지났다. 일 년 치 퇴직금이 쌓였을 때, 나는 시급제 직원보다 월급제 직원의 퇴직금이 더 많다는 사실과, 시급제로는 사수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알자 곧장 월급제로 변경했다. 그리고 첫 월급제 직원으로서 일 년 치 퇴직금이 쌓인 걸 보자 허탈함이 먼저 찾아왔다. 정말로 월급제 직원의 퇴직금은 시급제 직원 두 배나 더 높았던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월급제로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들었다.

  이번엔 내가 사수처럼 짙은 갈색의 유니폼을 받았다. 이젠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꼭 이름 뒤에 ‘시니어 님’이란 호칭을 불러야만 했다. 이제 사수를 따라잡는 데 한 발자국 나아갔다는 기쁨도 잠시, 사수는 회색 빛깔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아직은 최하위에 있는 매니저였지만 ‘매니저 님’이란 호칭을 붙여야만 했다. 그녀는 이제 홀에서 주문을 받기보단 식재료와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했고, 틈틈이 주방 업무에 대해 배웠다.

  시니어 직급을 달고 자연스레 아르바이트생 교육 업무도 내게 주어졌다. 첫 교육 업무는 신입이 매뉴얼을 잘 외웠는지 시험을 보고, 홀에 나가 주문을 받는 걸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번 신입은 두 명으로 한 명은 대학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자였다. 신입 남자는 나이가 좀 있었고, 경력이 있어 주어진 일을 잘 처리했다. 그러나 대학생 여자는 시험도 낙제 점수였고, 손님들 앞에서 어리바리한 모습만 보였다. 나는 그녀를 따로 불러 매뉴얼을 외우긴 한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왜? 매뉴얼 다 못 외웠어? ”

  “네. 그래서 다시 교육하고 있어요. “

  “그냥 오늘까지만 사이드 돌리고, 내일 다시 시험 봐. 그래도 되지? “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입 아르바이트생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셈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지기 싫었다. 나 만큼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존재하지 않다는 걸 심어주고 싶었다.

  “네. 그렇게 할게요. “

  그녀의 인상이 따듯한 것처럼 보이려면 그 상황에서 꿋꿋하게 신입을 혼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뜻대로 해주기 싫은 게 전부였다. 그녀가 네,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나를 향한 인상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사수가 내게 따갑게 굴었던 건 정말로 나를 하루빨리 퇴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일부로 모질게 군 것도 있겠지만 회사 입장에선 일을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아르바이트생은 빨리 쳐내야 했다. 홀 서빙 직원들은 손님들의 만족도 조사도 영향을 끼쳤지만 시니어급 직원에겐 본사 점수가 더 큰 영향을 주었다. 시니어는 교육한 직원들의 역량을 보고 시니어의 역량을 측정한다. 본사가 와 직원을 시험하는 건 일을 한 지 3개월이 지난 뒤이니 못 버틸 만한 직원은 하루빨리 쳐내는 것이 맞았다.

  나는 신입 대학생인 유나가 그만두길 바라진 않았다. 그녀에게 동질감이나 연민을 느껴서는 아니었고, 그녀가 잘 성장해 판매 왕이 되는 것이 사수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나는 마감 청소 시간 때 화장실에 숨어 남자친구와 전화를 했고, 어린이날처럼 바쁜 날 못 나올 것 같다는 통보만 하곤 일을 나오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사람들의 미운 오리였다. ’ 비하인드 유‘라는 말을 하지 않고 뒤를 지나가다 부딪혀 음료를 쏟아내기도 했고, 다 먹지도 않은 손님 접시를 치우기도 했다.

  본사에서 시니어 역량 측정을 왔다. 나도 모르게 파르르 손을 떠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첫 시니어 시험이죠? 너무 떨 필요 없어요.”

  본사 직원이 내 어깨를 한 번 토닥이며 말했다.

  런치 타임에 출근한 신입 남자는 만 점을 받아냈다. 직원은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직원 교육을 아주 잘한 것 같다고 칭찬했다. 나는 매뉴얼대로 감사합니다,라고 먼저 말을 한 뒤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수는 언짢은 듯 괜히 내 주변을 서성였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승리감이었다.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뭉개었다는 목적을 이룬 것 같았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곧 있으면 유나의 출근 시간이었다.


  유나는 출근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매장에 도착했다. 그녀가 내 눈앞에 얼굴을 보였을 땐, 유니폼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나도, 사수도, 본사 직원도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저 그만둘게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본사 직원에게 사무실에서 기다려달란 양해를 구하고 유나를 락커로 따로 불렀다.

  “네가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그런데 오늘 갑작스레 말을 한 이유 정도는 알려주겠니? ”

  “저 일 못하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저 나름 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대학도 제법 괜찮은 대학이에요. 그런데 어제 한 가족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나 같은 애들은 공부 못 해서 이런 데서나 일하는 거라고. 그러곤 자랑스럽게 자기 딸이 다니는 대학교를 말하더라고요? 근데 정말 자존심 상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제가 이런 곳에서 일 하는 거? 공부 못 한 애처럼 보이는 거? 아뇨, 그년 입에서 나온 학교가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라는 거예요. 시니어님은 여기가 직장이니 그런 자존심 따위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나는…… 그냥 용돈 벌이로 일 하는 대학생이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

  “……”

  흥분한 유나의 눈가가 촉촉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고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유나를 집으로 보냈다. 사무실에서 기다린 본사 직원에게도 상황을 얘기하고, 본사로 돌려보냈다.

  “마감은 제가 할 테니 매니저님은 퇴근하세요.”

  “너 오픈이었잖아. 곧 퇴근 시간 아니야? 내가 마감 칠 테니 퇴근해. “

  “괜찮아요. 제가 교육한 직원이 낸 펑크가 곧 제가 낸 빵 꾸니까 제가 감당해야죠.”

  나의 자존심은 이런 곳에서 일어났다. 시니어 시험은 대차게 말아먹었지만, 직원들이 저 여자를 좋게 보는 일만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다고.


  시니어가 되었을 때만큼 매니저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쁘지가 않았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는 부담감보단 사수가 내년에 점주가 된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어떻게 그 나이에 점주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나 분명한 건 본사나 높은 직책인 사람들 사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의심 가는 것 중 하나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둘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커플이었다. 사람들은 둘이 왜 연애를 하는지 의아해했지만 그녀의 남자친구가 관할 지역 지역장이란 사실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하나는 본사 임원과의 관계였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가끔가다 본사 임원이 차를 타고 그녀를 데리러 오곤 했다. 사수가 그 남자의 차를 탈 때,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는 게 느껴졌다.


  식자재 관리는 꽤나 까다로웠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흔히 알려진 유통기한을 지키는 대신 본사에서 정한 식자재 신선도 최적 기간을 지켰다. 그 기간이 다가오면 홀 서빙 직원들에게 추천 판매를 시키거나, 비싼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서비스로 냈다. 주방 직원들과 소통도 중요했다. 간혹 가다 홀 직원들과 주방 직원들과의 마찰이 있다면 내가 중재 역할을 해야만 했고, 주방의 마감 검사도 내가 해야 했다.

  “주방 업무를 좀 할 줄 알아야 메인 매니저가 될 수 있어. ”

  점주가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아 식자재를 보는 내게 말했다. 분명 예전 같았다면 네,라고 크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내일 주방 업무 레시피와 매뉴얼을 외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대답할 수 없었다. 이미 몸도, 마음도....... 무엇보다 그녀를 짓누르겠다는 목적이 희미하게 사라진 것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스물다섯이라 하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락커 거울 앞에 서서 커다란 카우보이 모자를 써보았다.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같은 빅 데이 때 시니어급들이 써야 하는 모자로 이젠 쓰지 않아도 됐지만 미묘하게 느껴지는 자괴감에 손을 뻗은 것이었다.

  ‘평생 서빙이나 하며 살아라.’

  불현듯 손님이 던진 말이 떠올랐다. 매장 안에선 그런 손님을 ‘진상‘이라 칭했지만 사실 그는 내게 보이는 그대로를 던진 것이었다. 유나가 왜 퇴사를 한 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대학에 간 친구들이 하나둘씩, 졸업을 하거나, 취직을 했다. 그들은 초봉으로 오 년이나 일 한 나만큼 월급을 받았다.

  격차가 벌어질수록 친구들과 연락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나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친구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사수가 점주가 되기 일주일 전, 나는 퇴사 절차를 밟았다. 세탁한 유니폼을 반납하고, 락커를 비우고 나오자 휴게실 앞에서 사수를 마주쳤다.

  “퇴사한다며? ”

  “네. 이제 저 볼 일 없겠네요.”

  “나랑 일하는 거 좆같았지? 이제 직장 동료 아니니까 앞으로 마주치면 언니라 불러. “

  그녀는 한때 내게 목적이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퇴사하지 않았고, 월급제 직원으로 변경했고, 시니어와 매니저를 달았다. 그러나 내 절차와 달리 그녀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 아빠처럼 살아야 해.‘

  이제야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야망이 가득 담겨 들끓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어떤 눈동자를 하고 있었을까. 차라리 거울을 마주했을 때 눈을 보지 않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네. 언니라고 부를게요. “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살짝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에서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졌구나.

  차리리 끝까지 파인애플을 목표 삼을걸.


  명함


  패밀리 레스토랑 퇴직금으로 일 년은 먹고 놀았다. 일 따위 당분간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패밀리 레스토랑 때문에 못 했던 네일도 해보고, 피부과도 다니고, 가슴이 움푹 파여있는 옷도 사보았다. 내가 돈을 쓸 때마다 그들은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메인 매니저가 되고부터야 명함을 주었는데 이런 곳들은 그냥 명함을 주는 듯했다.

  명함은 깨나 거창한 것처럼 적혀 있었다. 네일아트를 하는 사람은 ‘에스테틱 디자이너‘ 라든가, 옷가게 점원은 ’ 패션 MD‘ 라든가. 그러나 옷가게 점원들이 'MD'를 ’Merchandiser‘가 아닌 ’Manager Director‘로 이해하는 걸 보고 명함은 그저 종이쪼가리라는 걸 깨달았다.


  언제까지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걸 느꼈을 때, 이미 통장 잔액은 초라하게 찍혀 있었다. 일단 급하게 들어간 회사는 성인 잡지를 파는 회사였다. 본인을 부장이라 소개한 남자는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명함을 만들어 주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명찰 하나 받는 것도 한 달이 걸렸는데.

  명함에 적힌 이름 옆에는 ‘영업기획총괄총장’이란 직책이 붙어 있었다. 거래처 직원에게 보여주기 식으로 적은 것이나, 그냥 ‘잡일’ 하는 직원이란 뜻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매니저까지 했다면 영업 잘하겠네. “

  열 명도 안 되는 회사에서 부여받은 본 업무는 영업이었다. 그래서 거래처를 만나 잡지를 설명하고, 파는 일을 할 줄 알았다.

  그가 처음 보낸 출장지는 홍대에 있는 클럽이었다. 내가 할 일은 거기 숨어 들어가 화장실이나, 테이블 바닥에 잡지를 보이도록 두는 것이었다. 홍대는 성에 유독 열정적인 어린 남자들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정말로 홍대 클럽으로 출장을 다녀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잡지 판매량이 오르는 걸 볼 수 있었다.

  클럽, 군부대 앞, 지하철, 대학가 심지어 노인 복지관까지 다양한 이유로 신분을 위장하고, 위장 홍보를 했다. 그리고 경쟁사가 놓은 잡지가 있으면 치우는 것도 내 일이었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회사가 날 합격시킨 진짜 이유를.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출장을 가지 않을 땐, 회사 책상에 앉아 마우스만 괜히 딸각거렸다. 간혹 보이는 오타나 맞춤법이 틀린 게 있으면 커뮤니 하기도 했다.

  회사 안에서 가장 욕심이 생긴 건 촬영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곡선을 띄는 나체를 그대로 드러낸 여성을 찍는 공간을 괜히 서성거렸다. 사진작가는 힐끔거리는 날 볼 때마다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그리곤 그가 사진을 찍는 각도와 조명, 줌인 정도를 눈에 익혀보았다.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가 최대한 카메라에 전부 담기도록, 이 사진을 본 남성의 성기가 빳빳하게 솟아오르도록 사진은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다음 자세는 직접 한 번 찍어볼래요? ”

  “네? 제가요? ”

  “네. 관심 있는 것 같길래요. 어차피 다음 찍을 건 추가 여분 사진이라 잡지에 잘 수록되지 않아요. ”

  나는 그에게서 건네받은 사진기를 한참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각도와 줌을 조정했다. 검지에 살짝 힘을 주니 찰칵, 하고 셔터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 소질 있는데요? 사진 괜찮게 잘 나오네.”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촬영 모델도 내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번 잡지에 이 사진 한 번 넣어보아도 되겠는걸요? ”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

  

  표지 메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찍은 사진이 잡지에 실렸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이 잡지에 관여했다. 나는 연신 내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나체의 여성은 손으로 유두만 가리고 있었고, 외에는 모두 뽀얀 속살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표정도 남자들의 흥분을 사기 충분했다. 괜히 찾아오는 설레발에 그녀의 표정을 따라 하기도, 포즈를 취해보기도 했다.

  “내 작품이야. 멋있어.”


  잡지 홍보는 더 적극적으로 했다. 단순히 내 작품이 실렸기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클럽 화장실에 어떻게든 잡지가 잘 보이도록 놓고 왔고, 팀장이 시키지 않은 나이트나 포차까지에도 잡지를 놓았다. 괜히 서점에서도 주변을 서성이며 잡지를 향해 오는 남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이번 건 별로던데. “

  그런 대부분 남자들은 손을 머뭇거리다가 독촉하는 내 잡지를 샀다.

  그리고 다음 월간이 나오기 하루 전, 이번 잡지 판매량을 확인해 보았다. 역대 매출 중 최고점을 기록했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내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사진에 빠져 미처 알지 못한 게 있었다. 내 사진이 실린 페이지의 소제목이 ‘MZ 세데의 파격적인 도발’이라 적혀 있던 것이었다. 이 잡지를 사는 사람들은 글을 읽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 큰 글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 월간 화보 메인 표지 모델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여자라고 했다. 그녀는 더 어려 보이도록 홍조 화장을 했고, 주근깨로 포인트를 주었다. 밝은 옷차림은 그녀가 마치 아이처럼 보이게 했지만 시선은 깊게 파인 가슴골에 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간 출장이는 클럽이었다. 평소처럼 클럽 가드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신분증을 쥔 가드가 인이어로 누군가에게 잠깐 와보라고 요청했다. 순식간에 달려온 남자는 가드와 귓속말로 뭐라 속삭이더니 고개를 서로 한 번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업장과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습니다.”

  가드가 신분증을 돌려주며 말했다.

  “네? 왜요? ”

  “죄송합니다.”

  나는 곧장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자초지종 설명했다. 그는 관계자와 직접 한 번 연락을 해본다고 말하곤 통화를 끊었다. 그리곤 일 분채 되지 않을 때 다시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올해로 서른이지. 서른부턴 입장이 안 돼.”

  “그럼 전 어떡하죠? ”

  “어떡하긴. 집에 들어가서 푹 쉬어.”


  불법 홍보에 가장 큰 역할은 클럽이었다. 이제  더 이상 클럽에 들어가지 못하자 회사에서 ‘영업기획총괄총장‘ 역할을 못 하는 인간이 되었다. 직원들이 내게 일거리를 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책상에 앉아 모니터만 보다 퇴근을 했다.

  팀장은 이런 하루가 반복되는 걸 도저히 못 보겠는지 나를 따로 불러냈다.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 ”

  “저도 그건 아직 안 정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지금 네 위치가 너무 애매해. ”

  “저 그래도 지난번 월간에 제 사진도 실렸는데 그럼 사진이라도 찍을게요. 오히려 같은 여자니까 모델들도……”

  “그건 안 돼. “

  그는 의외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곤 검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면서 볼멘소리를 내었다.

  “차라리 모델이 되어보는 것도…… 역시, 나이가 좀 있으니 안 되겠지? ”

  “제가 모델이 되라고요? ”

  나도 모르게 콧방귀가 나왔다. 이제야 그의 의도를 모두 읽어낼 수 있었다. 난 온전히 수단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수단이 역할을 다 했음에도 마지막까지 꽈악 쥐어 짜내려는 것을.

  “그럼 그냥 그만두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냄새는 가릴 수 없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 아빠처럼 살아야 해.”

  

  서른이 넘었다.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무언가 꾸준히 한 적 없는 서른의 여자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다단계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월급이 나오고, 실적에 따라 보너스까지 챙겨주는 회사에 들어갔다. 욕은 전화를 건 데이터 베이스 손님에게도, 텃세를 부리는 나이 든 여성에게도 틈틈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입술을 앙 다물고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여기밖에 없었으니 숙이라면 숙이고, 엎드리라면 엎드려야 했다.


  우연히 SNS를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고등학교 친구들의 소식이었다. 대기업 직원과 결혼한 친구의 소식, 송파구의 비싼 아파트를 분양받은 친구의 소식. 무엇보다 참을 수 없던 건 지역장이 된 사수였다. SNS를 볼수록 비참해지는 건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손을 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난 뒤,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화면 위로 비추어지는 내 얼굴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초라한 건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는 내 눈동자였다. 언제부터 아빠를 닮았던 눈이 이렇게 변한 걸까. 어쩌면 엄마가 이혼했을 때부터 내 눈빛은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애써 눈을 감고 있던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썩은 동태의 냄새는 가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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