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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Feb 29. 2024

독백, 아무도 듣지 않을



  젊음이란 찬란한 중독이다.

  고귀한 젊음은 내 뒤에 서서히 다가오는 노화를 온전히 가려버린다. 나는 찬란한 중독에 취해 늙어간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주름진 얼굴을 마주했을 때야 중독은 치료된다.

  비가역적인 흐름. 인간은 죽음의 문으로 향한다. 여전히 지금도.


  모든 것이 비가역적이었다. 언제나 내 곁에 있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것도, 혼자가 된 것도, 아내가 찾아온 것도, 아이가 생긴 것도, 아내가 떠난 것도, 서울에 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결국 나는 혼자가 됐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모님이 곁에 있기 마련이니 이것 또한 원래 상태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내뱉으며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에 멈추어 미동도 않는 시계는 내 손목 위에서 제 역할도 못 하는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나와 같아 시계를 풀지 못했다. 적어도 동질감이 생기는 무언가가 함께 있으면 조금이나 덜 외로웠으니까.

  언제 끓였는지도 모르는 된장국을 댑혔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청년들이 두고 간 즉석 밥을 돌렸다. 식탁 위에는 식기끼리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식탁 위가 시끌벅적했던 게 언제였을까. 소음이 줄어들수록 반찬의 갯수도 줄어들었다. 접시 위에 정갈하게 담겼던 반찬들도 이젠 다회용기 그릇에 담긴 채 식탁 위에 올랐다. 다회용기 그릇에 담긴 반찬은 오래 지나면 고리타분한 냄새가 났다. 역겨움을 꾹 눌러 참고 밥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입을 크게 벌리면 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럴 때마다 눈가에 주름은 한껏 더 강렬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된 건 반찬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하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절로 눈이 일찍 떠지면 하루는 더욱 느리게 흘러갔다. 오랜 낮잠 뒤에 땀으로 몸이 흠뻑 젖으면 간신히 남들과 비슷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아무리 낮잠을 청해도 눈이 감기지 않으면 기도를 했다. 십자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면 절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천천히 기도문을 외우면 나만의 세상이 열렸다. 그 세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시간인들 빠른 속도로 흘렀다.

  벌컥, 열린 문 뒤로는 곧장 아내가 구수한 냄새가 나는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고,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를 데리고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멈추었던 손목시계의 초침도 움직였다. 피부가 주름지는 단백질의 변성처럼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순간임을 나는 기도했다.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고 있음에도 나는 기도했다. 어쩌면 기도란 대가 없이 한껏 망상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문이지 않을까.


  분명 죽음이란 두려운 존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지금 내게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삶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 신체 곳곳의 고통, 희망고문.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생물체들은 어찌 그리 우아한지 비둘기를 따라 하늘을 날고, 강아지를 따라 초원을 달리고, 금붕어를 따라 물속을 헤엄치고 싶도록 하는 생생함! 각자의 제 역할을 하는 것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답다. 그렇기에 나는 아름답지 않다. 내게 주어진 역할 따위 없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죽음보다 두려운 삶이 내 목을 옥죄어왔다.

  대중교통 안에서 무거운 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비켜주는 생생한 청년, 황금 같은 주말에도 한 달치 식료품을 배달하러 다니는 우아한 청년. 그 생생함에 생채기가 날까 애써 고개를 돌렸다. 촉촉한 그들의 눈을 마주한다면 더욱 내 오래됨이 더 비교될 것 같았다. 아니, 이제 이것도 익숙해져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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