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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Oct 06. 2022

하루의 마지막, 멈춰버린 지하철

인디밴드 보컬, 신인 개그맨, 작가 지망생, 대입 재수생 중 한 명 등장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지쳤는지 좌석에 앉아 하나 둘씩 고개를 숙였다. 재희는 입술이 서서히 떨었다. 그녀는 어깨에 맨 커다란 책가방을 앞으로 돌리더니 교과서를 하나 꺼내 종잇장을 찢을 기세로 책장을 넘겨댔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수학 공식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을 본 전철 안 사람들은 그녀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재희가 입가에 거품을 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안이 드러나자 재희가 괴로운 듯 허공에 대고 팔을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면서 서로 눈을 피했다. 그때,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백발머리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여자가 그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발을 디뎠다.

 남자는 재희를 눕히더니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허공을 가르는 재희의 손끝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는 재희의 책가방이 놓여있었다. 그는 책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지퍼를 열자 네뷸라이저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꺼내 재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재희는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뷸라이저에 새하얀 김이 서렸다. 천천히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해지자 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천식 있으신가 봐요.”

 남자가 재희에게 물을 건네며 물었다. 재희는 물을 연신 들이키더니 사례가 걸려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작년 수능을 망쳤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절로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희의 어깨를 토닥였다. ‘올해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재희는 어깨 위에 올라온 그의 손을 보고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전철 안 사람들은 그제서 그녀를 향해 동정어린 눈빛을 보냈다. 재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뱉자 남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재희는 오늘 시험편의 제공대상자의 입시 전략을 위한 강의에 당첨되어 대치동에 가는 길에 갑자기 전철이 멈추게 된 거라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 말을 듣고 남자는 혹시 그 강사가 김인배 강사의 강의가 아니냐고 물었다. 재희가 콧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겉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명함을 받아들자 명함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김인배입니다.”


 인배는 재희에게 시선이 쏠린 전철 안 사람들에게 이제 잘 마무리 되었으니 구조를 요청하는 데 집중하자며 두 번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들은 김인배란 이름을 듣자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기 자식이 고3인데 어떻게 원서를 써야 하는지,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질문을 끊임없이 내던지기 시작했다. 인배는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들의 질문은 멈추질 않았다. 인파에 밀려 노약자석까지 끌려간 재희도 덩달아 인상을 찌푸렸다. 인배는 재희의 얼굴을 보자 손을 높게 들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드릴 테니 상담은 나중에 하고 우선 구조에 신경 쓰자며 언성을 높였다. 다시 정적이 돌아왔다. 다시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그런데 인배의 팔을 붙잡았던 여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다리를 떨었다. 이윽고,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재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재희의 손에 쥐어진 네뷸라이저를 빼앗았다.

 “너 같은 애들 때문에 우리 아들이 공평하게 대학에 못 들어가는 거야.”

 여자가 전철 창문을 향해 네뷸라이저를 던지려고 하자 인배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인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 하는 행동은 살인과 다름없다고 이르자 여자는 손에 힘을 풀었다. 인배는 다시 재희에게 네뷸라이저를 건넸다. 그러나 이미 재희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같은 애들은 대학에 가면 안 되는 거 에요……?”

 인배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어주었다.


 전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자신이 구조대라는 소리가 들렸다. 전철 안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인배도 옆에서 그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했다. 그때, 재희의 눈에 인배의 귀에 꼽힌 보청기가 들어왔다. 재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네온사인이 재희를 반겼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서울의 밝은 야경보다 인배의 보청기가 더 선명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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