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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 조인순 작가 May 26. 2024

혼자 떠나는 여행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순간에 모든 상황이 변했다. 현역에서도 물러나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 더는 가족을 위해 봉사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찾아왔다. 나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쓸쓸한 빈 둥가 된 것이다.

  빈 둥지 증후군을 겪지 않으려면 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저 내 몸 하나만 잘 건사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모든 것을 면죄 받고도 기쁘기는커녕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다. 일과 가사를 병행하며 정신없이 보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내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아도 되는 것인지, 불안하고 초조해 서서히 공황상태가 되어갔다.

  철저히 규칙적인 생활을 했기에 몸에 밴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사회에서 뒤처지고 잉여인간이 될 것 같았다. 평생 일만 해서 노는 법을 배우지 못한 죄로 놀면서도 제대로 노는 법을 몰라 이것저것 쉬지 않고 움직이며 신세를 들들 볶았다.

  맥없이 시간 죽이기를 하기에는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들보다 얼마 남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을까.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혼자 노는 법을 배워두는 것인데 후회막급이다.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배우며 누군가에게 기대어 위로를 받고 시간을 보내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텐데 현실은 녹록하지가 않다. 친구들의 만남도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만 한다.

  결국 남겨진 여백을 채우기 위해 나를 비워나가는 연습과 겸손을 배우는 일이었다. 낮게 조금 더 낮게 겸손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예전에는 혼자 여행하는 것이 무섭고 겁났다. 타지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그런데 바람처럼 물처럼 걸리는 게 없어 이것도 습관이 되니 괜찮았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다 보면 당일 날 급한 약속이 생길 수도 있고, 컨디션이 나빠 여행 가기가 불편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여행을 하다 보니 그런 불편함이 없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소통의 의무를 가지지 않아도 되고, 오직 나 자신에게 집중하며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사유하고 사색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움직이니 편했다.

  여행 중에 느낀 것들을 기억 회로에 저장한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그것들을 꺼내 기록하기 위해서다.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마음은 편했지만 몸이 항상 녹초인 것이 문제였다. 점점 장거리 운전이 힘들었다. 오다가 휴게소에 차를 대놓고 차 안에서 잠을 자고 올 때도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어, 여행은 마음이 뛸 때 가는 것이 아니고, 몸이 건강할 때 가는 것이 맞다.

  오늘도 나는 습관처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켜고 물 한잔을 마신 다음 일기예보부터 확인한다. 집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국 날씨를 확인한다. 날씨가 좋으면 오늘은 또 어디로 떠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수집해놓은 자료를 보며 머릿속에서 빠르게 데이터를 분석한다.

  데이터 분석이 끝나면 떠남을 결정하고 빠르게 움직인다. 아침으로 간단히 우유와 바나나를 먹고, 세수를 하고 몸을 정리한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냉동실에 넣어둔 쑥 개떡 하나와 과일을 꺼내 물과 함께 가방을 챙긴다.

  혹여, 신이 짓궂은 장난을 칠지도 모르는 시간에 대한 것도 준비한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순간을 위해 나가기 전에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창문과 가스는 안전한지, 청소는 되었는지, 쓰레기는 비웠는지, 설거지는 했는지, 화초에 물을 충분히 주었는지, 마지막으로 나의 흔적을 지우는데 필요한 유서도 잘 보이는데 두었는지 확인한다. 점검이 끝나며 가벼운 마음으로 차키를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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