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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 조인순 작가 Jun 09. 2024

논의 사계


  봄의 논은 나약하고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봄비가 오면 농부는 겨우내 묵힌 논을 진갈이를 한다. 물을 머금어도 흙은 쉽게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갈아엎은 논은 두벌갈이를 하고, 흙을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써레질을 한다.

  흙과 물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끌어안고 걸쭉하게 되면 비로소 논은 새로운 생명들을 키워낼 준비를 한다. 농부는 다시 논에다 거름을 골고루 뿌린다. 그 위에 비닐을 덮고 못자리를 한다. 모가 이십 센티 정도 자라면 모찌기를 하고, 모춤한 모들은 논으로 옮겨 모내기를 한다.

  지금은 모두 기계로 모내기를 하지만, 예전의 모내기는 동네잔치였으며 두레의 장이었다. 일손이 모자라면 학생들은 학업도 포기하고 모내기를 도왔다. 그만큼 농업사회의 모내기는 중요했다. 제때에 모를 심지 않으면 일 년을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모내기를 끝냈다고 해서 모가 그냥 자라는 것은 아니다. 모내기 후 사름이 가장 중요하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온갖 질병과 싸워내기 위해 예방주사를 맞는 것처럼 모도 마찬가지다.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작은 모는 몸살을 심하게 앓는다.

  농부는 자식을 보살피듯 하루 종일 논에서 산다. 뜬 모를 다시 심고, 몸살을 앓다 죽은 모를 건져내고 다시 심기를 반복한다. 잘 자라기를 바라며 물 조절을 한다. 논에 물이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모가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봄은 농부에게 나쁜 계절이다. 일 년 농사가 농부의 손에 달렸기 때문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제때 씨를 뿌리고, 제때 파종하고, 제때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그다음 해까지 굶주림에 허덕인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도 사계절 때문이지 사람들 잘 못이 아니다. 농업사회에서 굶어 죽지 않으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한 절기를 놓치면 가족 모두가 굶어 죽는다. 그러니 농부의 손은 늘 바빴고, 일손이 모자라는 농번기에는 학생의 학업보다 농사일이 더 중요했다.      



여름  

   

  여름의 논은 활기차고 멋진 청년의 모습이다. 논둑에도 콩과 팥을 심어 논과 논둑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푸르다. 이제 논의 모들은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푸른 바다처럼 변했다.

  모들이 잘 자란다고 해서 농부의 일손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농부에게 봄도 중요하지만 여름도 중요한 시기다. 논에다 뒷거름도 내야 하고 김을 맬 때 모 뿌리가 뽑히지 않게 조심하고, 물갈이와 마른갈이도 해야 한다. 농부의 손을 쉴 틈이 없다.

  푸른 강과 같은 논엔 많은 생명들이 찾아든다. 우렁이와 미꾸라지, 개구리와 거머리는 기본이고, 선두리와 소금쟁이, 물노린재와 물둥구리, 물맴이, 물진디 물속에 여러 곤충들이 살고, 여치와 메뚜기, 거미도 살고, 오소리와 왜가리, 물오리도 산다. 논은 먹이 사슬의 천국이므로 많은 생명들이 모여든다.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생명들이 햇볕과 달빛을 받으며 경쟁하며 함께 살고 있다. 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에는 작은 생명들은 벼 잎 속으로 몸을 숨긴다.

  바람이 불면 파도처럼 푸른 벼가 출렁거리고, 논바닥의 물도 벼에 부딪혀 찰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 아름다워 넋이 나간다. 논은 한마디로 또 다른 거대한 우주다.

  낮이면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벼는 하루가 다르게 커간다. 논에 해가 지면 달빛 아래 밤손님들이 찾아온다. 개구리 맹꽁이 울음소리 들리는 밤이면 나그네인 바람도 지나가다 잠자는 벼를 깨우고 간다. 벼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볍게 흔들린다.

  여름이 깊어 가면 벼는 배동을 한다. 결혼한 여인이 임심을 하듯 배가 불룩해지면서 출수(출산)을 한다. 출수한 벼는 하얀 꽃을 피우는데 농부들은 이것을 ‘자마구’라고 부른다.

  벼꽃은 오전 10부터 오후 2시까지 핀다. 땡볕에 피는 꽃이 벼꽃이다. 그리고 벼꽃은 개화라고 하지 않고 ‘출수’라고 한다. 이삭이 나온다는 뜻이다. 벼꽃을 확대해 보면 꼭 우리가 먹는 밥알 같다.

  사람들은 벼도 꽃이 피느냐고 묻고, 또 어떤 사람은 쌀 나무라고 하기도 한다. 벼는 다년생이 아니고, 일 년생이므로 나무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자손 번식에 열을 올리기 때문에 꽃을 피운다. 그래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벼꽃은 너무 작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을     


  논의 가을은 중년의 모습이다. 농부의 노고를 먹고 자란 벼는 비바람과 태풍을 이겨내고 누렇게 익는다. 논이 황금색으로 변하고 알곡이 여물어 무거워진 벼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겸손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농부는 여름내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 자식처럼 금이야 옥이야 키워낸 벼가 잘 자라서 누렇게 익으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인 추수만 잘하면 일 년 농사는 끝난다. 논의 임무도 끝나고 논도 동면기에 들어간다.

  누렇게 익은 벼는 새들을 불러들인다. 논에는 영양가 가득한 알곡과 곤충들이 많아 새들에겐 최고의 성찬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논에다 허수아비를 세워 놓지만 말 그대로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다. 새들이 귀신 같이 허수아비라는 것을 먼저 안다.

  벼가 익으면 논은 마른갈이를 하고, 논바닥이 꾸덕꾸덕 해지면 기다렸다 벼를 벤다. 벼를 제때 베지 않으면 낟알이 모두 떨어져 흩어진다. 일 년 농사를 망치는 것이다. 요즘은 자동탈곡기로 벼를 베지만, 예전에는 모두 낫으로 벼를 벴다. 기계로 베든, 낫으로 베든, 모든 농작물은 농부의 손에 의해 심어지고 거두어들인다.

  탈곡한 벼는 햇볕에 말려 정미소에서 도정을 한다. 이제 벼에서 쌀이 되는 것이다. 여름내 고생하며 농부와 함께 논이 키워낸 결과물이다. 이처럼 논은 벼를 키우고 거두고를 반복하며 벼의 일생과 함께 한다.



겨울     


  벼가 베어진 논은 노년의 모습이다. 벼의 밑동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논은 황량하고 쓸쓸하다. 추수가 끝난 논에는 철새가 날아든다. 벼 이삭과 웅덩이에 남아 있는 우렁이와 미꾸라지가 있기 때문이다. 먼 나라에서 날아온 철새들은 우리나라 논이 있는 곳곳에서 쉬었다 봄이 오면 다시 날아간다.

  그 많은 생명들을 품었던 논에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만 휑하니 분다. 물웅덩이마다 얼음이 얼어 있고, 가끔은 아저씨들이 삽으로 논바닥을 파기도 한다. 논바닥 밑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미꾸라지를 잡기 위해서다. 논은 이렇게 겨울에도 생명들이 살아 있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논에 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보면 너무나 황량하고 쓸쓸해 눈물이 날 것 같다. 눈에 뒤덮인 논은 거대한 빙하 같기도 하고, 다시 눈이 녹으면 메마른 사막 같기도 하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사막 같은 논은 그렇게 길고 긴 겨울잠을 잔다. 새로운 생명들을 키워낼 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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