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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 조인순 작가 Sep 15. 2024

기억에 대하여


  은행에서 이것저것 볼일을 바쁘게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야, 오랜만이다. 잘 있었지?” “어, 어어?” 순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어정쩡하게 답을 하고 말았다.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선배 아니면 친구인데 과연 그녀는 누구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또다시 그녀가 툭 치면서 “나 먼저 간다.” “어, 그래.” 다시 어정쩡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필자는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도 집으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녀가 누군지.


  뇌 과학자 존 메디아에 의하면 인간의 기억은 때론 과장되고 종종 왜곡하며 대부분 잊힌다고 한다. 기억은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드러눕는 개와 같다고.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 그러니까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 그 기억은 왜 그렇게 불안전한 걸까? 한마디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눈뜬장님’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뇌로 세상을 보지,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눈뜬장님’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그냥 카메라렌즈다. 그 렌즈로 사물을 찍어서 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렌즈의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고 사진을 찍지 않으면 사진이 잘 찍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윤기 작가는 어느 날 명동거리에서 약속이 있어 나갔는데 저 멀리서 아주 익숙한 여자가 자신을 향해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굉장히 낯이 익는데 누구인지 그냥 바라보고 서 있는데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를 툭 치면서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마누라를 보고도 아는 체를 안 해요!”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이처럼 우린 거의 모든 것을 보이는 것도 제대로 못 보고 산다.


  그리고 우리의 뇌는 복잡한 것도 싫어한다. 학창 시절 수학문제만 보면 머리가 아파오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회의나 모임에서 긴 설명을 할 때 사람들은 짜증을 내며 말한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우리의 뇌는 인내심이 부족해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왜? 한마디로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기 때문에 피곤해서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아무 데서나 드러눕는 개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만약에 어떤 것을 기억하고 싶다면 뇌에게 반복적으로 학습을 시켜야 한다. 똑같은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경험을 해도 기억은 모두 다르다. 그 이유는 사람의 두뇌 속회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린 기억이라는 것을 백 프로 믿을 것은 못되지만, 그래도 그 기억 때문에 힘든 세상을 살아간다.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회로에 저장해 놓고 두 번 다시 실패라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는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쓰디쓴 기억도 있다. 기억은 가끔씩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지만, 그래도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므로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의 냄새와 맛을 소환해 추억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녀의 생각으로 하루 일상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그녀를 기억하기 위한 노력은 밤늦게까지 계속돼, 왕 짜증도 나고 개 짜증도 났다. 기억 속 서랍들을 아무리 뒤져도 그녀의 흔적은 없었다.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머리까지 쥐어뜯었다. 벽에다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았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인데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것인지…….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망각이라고 한다. 그 망각 덕분에 우린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버리고, 소중한 기억은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기억한다. 그 정보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까지 하면서 반복적으로 노력하며 기억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 기억 속에 그녀가 없다는 것은 그녀의 존재가 특별하지 않았거나, 바람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까지 까맣게 모를 리가 없으므로 짜증은 나지만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접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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