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그날이 그날 같은데 새해가 되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싶어진다. 이것은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20대에 맞은 새해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슬픔과 비애로 얼룩져 있었다. 그때의 젊은 청춘들은 억압에 짓눌려 있어 가슴속에 뜨거운 불덩이 하나씩을 품고 다녔기 때문이다. 밤 12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통금이 시작돼 새벽 4시에 풀리는 시대였다.
일 년에 두 번 크리스마스이브와 12월 31일 통금이 해제되어 젊은 우리들은 밤을 새워 쏘다니며 놀았다.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갈 때도 없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우리 젊음들은 군밤을 사 가지고 호주머니에 넣고 까먹으며 명동과 종로를 걸어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러 갔다. 추운 줄도 몰랐고 왜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일 년에 두 번뿐인 자유를 놓치지 않고 즐기며 거리를 배회했다.
밤사이 스마트폰에 수많은 새해 인사가 도착해 있다. 축복과 안부를 전하는 인사들은 상대를 생각하며 직접 쓴 글은 몇 안 되고 거의 이모티콘과 이모진이 대신했다. 나는 새해 인사를 받고 한동안 생각의 심연에 잠겼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형식적이고 건조한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천착까지는 아니지만, 숙고해 볼 일이었다.
인류가 나무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선조들이 사물의 형상을 본떠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만든 상형문자가 21세기의 IT와 결합하여 이모티콘과 이모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줬다. 이젠 굳이 못 쓰는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들만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후유증으로 너나없이 고통 받고 있을 때 1960년 가난한 시기에 태어나 농업사회와 공업사회를 거쳐 21세기의 첨단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은 참으로 환경적 적응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빠른 격변기를 한꺼번에 겪으며 살아서 그런지 신세대처럼은 아니지만 감탄할 정도로 적응을 잘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어느 곳을 가든지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길을 쉽게 찾아갈 수 있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 그곳에 전화를 걸어 지명과 건물의 특징과 상호를 물어물어 갔었다.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편리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왜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걸까? 그 또한 나를 생각의 심연에서 쉽게 나올 수 없게 한다.
문제는 내비게이션이 알려준 길을 따라 여러 번 가더라도 그 길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는 편리함을 사용하는 대신 호기심과 정서를 잃었다. 그 지역의 길이 갖는 특성과 환경적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호기심과 정서가 메말라 눈뜬장님이 된 것이다. 첨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뇌는 지식과 정보로 가득해 윤택한 삶을 살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니체도 “인간의 감각은 문명의 발전을 통해 약해졌다고” 했다.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몸과 손발을 열심히 움직여야 뇌도 살아 움직이는데 우리의 뇌는 점점 무(無)뇌가 되어간다. 시대의 편리함 때문에 뇌가 할 일이 없어져 가족의 전화번호는 당연하고 자기 자신의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러다 사람들이 뇌를 사용하지 않아 후세에는 인간 몸의 형태도 변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