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새벽을 활짝 열고 이것저것 챙겨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확 하고 얼굴에 사정없이 들이댄다. 순간 기온 차이로 피부 세포들과 말초신경계의 분열이 일어나 온몸에 전율이 느껴진다. 아침 7시가 가까운데도 아직 사물의 분간이 어렵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어스름한 새벽은 기지개를 길게 켜며 하품을 늘어지게 한다. 달팽이는 집을 지고 여행을 떠나고, 사람은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여행은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챙겨간다.
겨울 여행지인 강원도는 느낌에 눈이 많이 쌓여 있을 것 같지만 괘방산은 눈이 하나도 없었다. 날씨는 포근하고 바다를 향해 병풍처럼 펼쳐진 능선을 따라 3시간가량 걸었다. 등산로는 완만해서 초보자가 걷기에도 무난했다. 길가의 작은 소나무가 가지들을 흔들어 대며 나그네를 맞는다. 까슬까슬한 솔가지가 얼굴에 닿아 따가웠다.
괘방산 정상에서 바라본 겨울바다는 물너울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얀 파도에 세수를 뽀얗게 한 바닷가 모래알은 맑은 얼굴을 내민다. 철썩철썩 구령에 맞춰 걸으며 파도가 들려주는 노랫소리에 귀 기울인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날아오르는 갈매기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바다 위를 맴돈다. 물너울을 타고 낮게 날며 사냥에 집중하고 있는 갈매기가 처음에는 바다 수면에 비치는 물고기인 줄 알았다. 탁 트인 넓은 바다를 보니 그동안 정신없이 달리느라 초주검이 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진다. 지친 영혼을 꺼내 맑은 바다 향에 깨끗이 씻어 다시 집어넣고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아 본다.
괘방산 정상을 지나 당집 앞에 서니 잘 자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호신처럼 당집을 지키고 있다. 당집 안은 기도 중인 무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제상만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괘방산 산신은 취기(醉氣)가 감도는 살굿빛 얼굴로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어서 오라는 듯 눈인사를 건넨다.
모락산과 청계산 산신의 안부를 물으며 미소 짓는다. 어느 이가 간절한 소원을 빌고 갔을까? 궁금한 마음에 당집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누가 무슨 소원을 빌고 갔느냐고 물어도 산신은 시치미를 떼고 있다.
삼거리를 지나 등명 해변으로 내려와 정동진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동진은 20년 전보다 많이 변해 있다. 바닷가에 서 있던 작은 소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주변이 관광명소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소나무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정동진의 푸른 바다는 그대로인데 바닷가에 서 있는 나그네는 옛 모습은 아니다. 격조했던 세월만큼이나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지 파도는 끊임없이 출렁인다. 언제쯤 이곳에 또다시 올 수 있을까? 생각의 끝은 수평선보다 멀고 아득해 차갑고 시린 추억 하나 바닷가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