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봄비가 내렸다.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라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지만 마음만은 포근하다. 메마른 땅에도, 메마른 마음속에도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현실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봄은 이렇게 또 희망이라는 씨앗을 가져왔다.
아랫집 세탁실 배관이 샌다고 우리 집 세탁실을 뜯어봐야 한다고 관리실에서 나이가 지긋한 수리공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낯선 이의 뜻밖의 방문에 하루의 일상이 깨지는 순간이다. 내심 불편하고 달갑지 않지만 문을 열어주었다.
아저씨는 연세에 비해 힘도 좋고, 요령도 있어 혼자서 세탁기를 들어내고 배관을 뜯고 좁은 데서 땀을 흘리며 노장이 노고가 많았다. 소음과 연기가 집안에 가득했다. 아저씨는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만, 집안에 낯선 사람이 있는데 방 안에서 편하게 있을 수가 없어 옆에서 일을 도와드렸다. 한참을 일을 하다가 아저씨 손이 도구에 살짝 베었다. 난 순간적으로 아저씨께 화를 버럭 냈다.
“아저씨! 그렇게 험한 일을 하실 때는 작업용 장갑을 끼고 하셔야지요! 장갑을 안 끼고 일을 하니 손을 다치잖아요! 우리들 모두가 힘들게 일하고 공부하는 궁극적 목적은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실기 위함이고,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렇게 손을 다치면 속상하고 아프잖아요. 저도 이렇게 속상한데 가족이 보면 오죽하겠어요!”
당황한 아저씨는 일손을 멈추고 멍하니 나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잘 참은 성격인데 순간적으로 폭발을 하면 제재가 안 되는 게 흠이다. 나는 한참을 더 잔소리를 해대며 씩씩거렸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고만 있던 아저씨가 작게 한마디 했다.
“장갑을 끼면 손이 둔해서 세밀한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요. 그리고 괜찮아요. 20대부터 50년을 넘게 이 일을 했더니 이젠 습관이 돼서 어지간하면 아프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습관이 됐다고 해도 상처가 나면 아프지 어떻게 안 아파요? 다 같은 사람 손인데 아저씨 손은 뭐 철갑입니까?”
나는 그렇게 아저씨에게 버럭 화를 내고 아저씨의 다친 손바닥에 반창고를 붙어 주었다. 아저씨의 손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손 전체가 상처투성이고, 나무의 외피처럼 거칠고 단단했다. 아저씨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일을 끝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은 거친 손은 아니었다. 항상 남에게 일을 지시하는 손이었고, 서예를 쓰는 손이었으며, 우리 형제들을 따뜻하게 쓰다듬는 손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손에는 은은한 담배냄새가 났다. 나는 잠이 오지 않은 밤이면 아버지의 손을 얼굴에 대고 아버지 냄새를 맡으며 잠을 잤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말끔하다고 해서 고뇌와 번민이 없는 손은 아닐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다는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자의 손이든, 학자의 손이든, 예술가의 손이든 이 세상 모든 아버지의 손은 무겁고 겁나고 외로운 손이 아닐까 싶다. 그 손에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