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왕과 건강한 거지

by 루아 조인순 작가


가을이 인사도 없이 가버린 날, 어제저녁부터 굶고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병원은 사람들로 붐볐다. 간호사는 내게 살아온 날이 많은 만큼 기재할 사항도 많다고 일찍 오라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문진표가 쾌 많았다. 깨알 같은 문진표를 꼼꼼히 작성했다.


병원에 오면 몸이 자동으로 로봇이 되고,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된다. 체중과 키를 재고 팔뚝을 걷어 올리고 혈관을 찾아 주사기를 꽂았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이 심장까지 박히는 것 같다. 주사기로 검붉은 피를 많이도 뽑았다. 전에는 피 뽑는 것을 쳐다보지 못했는데 요즘은 똑바로 본다. 내면이 단단해진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엽기적으로 변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사패인지 알 수가 없다.


“따끔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뭔 피를 그렇게 많이 뽑나요?”

“검사할게 많아서요.”


피를 뽑은 다음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다. 난 가슴 엑스레이를 찍을 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렀다. 작은 가슴을 잡아당겨 기계로 누르고 사진을 찍기 때문에 아파서 죽을 것 같다. 가슴 사진을 아프지 않게 찍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 점은 의료기를 만드는 분들이 고려해주었으면 좋겠다.


위 내시경을 할 때는 눈물이 자동으로 줄줄 나왔다. 의사는 조금만 참으라고 하지만, 비위가 약한 나는 헛구역질이 나고 무서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고문도 그런 고문이 없었다. 예약까지 하면서 돈 줄 테니 제발 고문 좀 해달라고 사정한 셈이니 할 말이 없다.


머리 쪽으로 가는 경동맥 초음파 검사도 했다. 난 드라마에서 사람들이 열 받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목 뒤에서 검사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귀밑에서 했다. 그제야 영화에서 드라큘라들이 사람의 목을 옆에서 무는 이유를 알았다. 의사는 경동맥은 깨끗하니 걱정 말라고 했다.


모든 검사가 끝났을 때 의사는 내게 신체 나이는 50대 인데 뼈의 나이는 70대라고 했다. 골다공증이 심하다는 말이다. 뼈가 안 좋으니 넘어짐과 부딪힘을 조심하고, 무거운 물건도 들지 말라고 했다. 다시 골다공증 약도 먹어야 한다고. 난 새가슴이 되었다. 보내버린 세월만큼 내면이 단단해지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만약에 신이 나의 신체 중에 하나를 가져가야 한다고, 마음대로 아무거나 하나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줄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몸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신께 내놓을 것이 없는데, 이제는 하나둘 고장이 난다.


늙음은 곧 건강하지 못한 몸을 갖는다는 의미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정신도 건강하지 못하다. ‘병든 왕보다 건강한 거지가 낫다’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겨울이 오면 추위를 잘 견디는 노인이 되고 싶었는데 막상 닥치니 이성적이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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