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삼복더위에 즐거운 소식보다 우울한 소식이 많은 하루다. 뉴스에 해외입양인들과 함께하는 시민단체에서 “현 정부는 해외입양을 종결하라”는 피켓을 들고 서있다. 해외입양은 한국전쟁 직후가 아닌 1970년대 본격화되어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최고조에 달해 8837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로 인해 외화도 많이 벌어 들였다고 하니, 한마디로 엄청난 아이들이 고국의 품을 떠나 낯선 곳으로 입양을 간 것이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 가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많이 가는 줄은 몰랐다. 가끔씩 해외로 입양 간 아이들이 성인이 돼 성공해 고국을 찾는 뉴스를 보면 부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일부이고, 수많은 입양아들이 입양과 파양을 거듭하며 성인이 돼 인종적 소외로 정체성 혼란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의 또 다른 치부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심각한 저출산 시대다. 그런데 갓 태어난 갓난아기가 엄마 젖도 못 먹고 태어나자마자 이틀에 한 명이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다고 한다. 이 얼마나 모순적 현실인가.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작은 분노가 일어난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식을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70년대 급속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서구의 성 개방 풍조가 급격히 밀어닥쳐, 미혼모의 연령이 낮아졌다. 1984년에 10대 미혼모 비율이 24.9%, 2000년도는 66.5%로 증가했다고 하니, 성을 더 이상 민망하다고 터부시 하지 말고, 가정과 학교, 방송에서도 청소년들에게 자연스럽게 습관처럼 몸에 배게 성교육을 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혼전 임신을 하면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풍토가 있는데, 그것은 뿌리 깊은 페미니즘의 잔재라 할 수 있다. 사랑의 결과가 남녀의 책임이지, 어찌 여자에게만 그렇게 가혹한지 묻고 싶다.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피임하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성은 쾌락적이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책임지는 것이라고 인식시켜야 한다. 그래야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나라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마련한 대책이 부모의 소득과 상관없이 2013년 3월부터 12개월 미만 영유아에게 양육수당이 월 20만, 24개월 15만, 36개월에서 미취학 아동은 월 10만씩 지급한다. 출산을 장려하는 것도 좋지만 부모의 소득과 상관없이 양육수당을 지급하는 것은 생각해봐야 한다.
빈곤층이야 당연히 양육수당을 지원해야 하겠지만, 소득이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다. 차라리 그 돈으로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가엾은 영유아들을 나라에서 잘 관리하고 교육시켜 훌륭한 인재로 키워낼 수는 없는 것인지…….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자는 운동은 방송에서 열심히 떠들어 대면서 왜 정작 우리나라 베이비 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 이야기는 안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부모가 누구이든 모두가 똑같은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아이들이다. 그들의 잘못도 아닌데, 정상적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둠에 갇혀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아이들을 외면하지 말고,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될 수 있도록 정부가 맡아 잘 키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