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주방 한쪽에 떡하니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 밤에 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가마솥이다. 이 가마솥이 우리 집에 온지는 꽤 되었는데 그동안 너무 무거워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 얼마 전부터 사용하고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와 같은 이것은 과묵함까지 보인다. 신형 냄비처럼 아름답지도 않고, 세련미 또한 거리가 멀지만 전혀 기가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삶의 애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중한 정서와 기억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료가 오직 나무밖에 없던 시절, 가마솥에 밥과 찌개는 물론 소죽도 쑤고 겨울이면 물도 데워 온 가족이 목욕도 했다. 잔칫날에는 솥뚜껑에 부침이도 부쳐 먹었다. 프라이팬 역할도 톡톡히 했다. 지금처럼 여러 가지 주방용품이 즐비해 있어 요리에 따라 그릇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가마솥 하나면 모든 요리를 다했다.
가마솥은 투박해서 볼품은 없지만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있다. 마을에서 어느 집이 야반도주를 했다고 해서 그 집에 가보면 가마솥을 떼어 낸 자리가 선명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음식을 익히고 물을 데우는데 꼭 필요한 솥은 떼 가지고 가는 것이다. 잘살든 못살든 우리들의 이삿짐 꾸러미 속에는 어김없이 시커먼 가마솥이 있었다. 이렇게 소중한 가마솥도 문명의 발달로 가벼운 양은솥과 신형 주방용품에 밀려 현대인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가마솥에 밥을 지으면서 유심히 보면 참 재미있다. 때가 되면 진주보다 더 하얀 쌀을 씻어 가마솥에 안친다. 그것을 받아 입속에 물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뜨거운 불 위에 정좌하고 앉아 무상무념에 빠진다. 몸이 달아오르면 조금 전의 평정은 잃어버리고 씩씩대며 입을 벌렁벌렁 거린다. 마치 무녀의 살풀이굿처럼 절정에 다다르면 백옥같이 하얀 거품을 끝도 없이 토해 낸다. 한참을 그렇게 거품을 토해 내고 나면 지쳐서 잠잠해진다. 조금 전 그렇게 날뛰던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불 위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맛있는 밥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진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동구 밖에서 신나게 놀다 보면 해가 뉘엿뉘엿 서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을 때 가가호호에는 하얀 연기가 안개처럼 스멀스멀 이 집 저 집으로 번져간다. 송아지도 배가 고파 엄마소를 찾으며 울어댈 때쯤 온 동네에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진다. 아이들은 그 냄새를 맡으면 제정신이 아니라 너나없이 모두 집으로 달려간다. 아침에 집을 나갔던 가족들도 이 밥 냄새를 맡고 서둘러 귀가를 하는 것이다.
손도 씻지 않고 대청마루에 옹기종기 앉아 저녁밥을 맛있게 먹었다. 검은 솥이 뱉어내는 눈처럼 하얀 그 쌀밥을 배 터지게 먹는 날이면 그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그런 날은 가을 추수가 끝나고 나서야 가능하지 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오늘도 가마솥에 밥을 지어 그리움을 한입씩 먹는다. 그윽한 쌀밥 향기가 입속에 퍼지면서 조부모님과 일찍 떠나가신 젊은 부모님이 말을 걸어온다. 그 말에 답하면서 소중한 기억을 한입씩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