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갔는데 입구에서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청년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자세히 보니 전에 검도장을 운영할 때 다니던 관원생이다.
“관장님 안녕하세요?”
“오, 그래, 민석아, 오랜만이구나.”
6살 때 검도장에 와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벌써 대학생이 되어 알바를 하고 있다. 코흘리개가 멋진 청년이 되어 자기 앞가림을 하는 것을 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대견하고 반가웠다. 부모가 맞벌이를 해서 유치원이 끝나면 형이 가는 곳마다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날 녀석이 수련시간보다 일찍 와서 사무실을 기웃기웃하더니 나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관장님 이거요.”
“이게 뭐니?”
“반지요. 관장님이랑 결혼할 거예요!”
“나랑 결혼한다고?”
“네에.”
“관장님은 이미 결혼했는데.”
“우리 엄마도 아빠랑 결혼했는데 나랑 한다고 했어요.”
“그럼 엄마하고도 결혼하고 나하고도 또 하는 거니?”
“아뇨, 이젠 엄마랑은 안 하고 관장님하고만 할 거예요.”
녀석은 그렇게 나에게 문방구에서 파는 플라스틱에 꽃무늬가 있는 반지를 내밀고 쑥스러운지 사무실을 후다닥 나가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6살짜리 아이에게 청혼반지를 받고 보니 난감했다. 정신없이 수련시간이 끝나고 녀석도 형을 따라 돌아갔다.
어쨌든 청혼반지를 받고 보니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끼리 다툼이 있어도 녀석을 야단치지 않고 잘 타일렀다. 반지의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40대가 6살짜리에게 청혼반지를 받았으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난 가끔씩 친구들한테 너희들은 6살짜리 꼬마에게 청혼반지를 받아 봤느냐고 자랑질도 했고, 은근히 녀석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며 츄파춥스 사탕을 사다 놓고 뇌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 들으니 녀석이 아이들과 싸우며 ‘개새끼’라고 욕을 했다. 데시벨이 점점 높아져 중재가 필요해 녀석을 사무실로 불렀다.
“민석아, 너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관장님이 들으니 친구한테 ‘개새끼’라고 욕하는 것 같던데 그런 욕을 어디서 배웠니? 너 그런 말 하면 입에서 벌레가 우글우글 나오는데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다시는 욕 안 한다고 관장님이랑 약속해? 그리고 친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얼른!”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자 녀석이 “새끼개!”라고 했다. 처음 듣는 말이라 어리둥절해서 녀석을 불러 물어보았다.
“민석아, ‘새끼개’가 뭐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자 녀석의 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관장님이 저번에 욕하지 말라고 해서 ‘개새끼’를 반대로 ‘새끼개’라고 하는 거예요.”
“뭐시라.....?”
난 그날 충격을 크게 받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6살짜리 어린아이 머릿속에서 그런 기발한 생각이 나올 수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있다가 녀석이 나를 찾아왔다.
“관장님 그때 준 반지 주세요!”
“왜?”
“여자 친구 주려고요.”
“너, 여자 친구 생겼니?”
“네.”
그렇게 나는 녀석에게 선물 받은 청혼반지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녀석은 보란 듯이 여자 친구와 커플링을 나누어 끼고 검도장에 데려와 인사까지 시키고 뛰어놀았다. 나중에는 사무실에 있는 츄파춥스 사탕도 마음대로 갖다 바쳤다.
‘나쁜 노므시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서 손을 보니 반지가 없었다.
“민석아, 너 반지 왜 안 꼈어?”
“그 애랑 헤어졌어요.”
“왜?”
“다른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나하고 안 논대요.”
“그래...?”
그렇게 녀석은 새로 사귄 여자 친구와도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여자 친구는 관심도 없고 운동만 열심히 하더니 2단까지 따고 그만뒀다. 그 후로 녀석을 보지 못했는데 뜻하지 않는 곳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점심이나 사주려고 했는데 알바가 늦게 끝난다고 했다. 그냥 오려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녀석에게 옛날 일을 상기시켜줬다.
“민석아, 너 예전에 관장님한테 줬던 반지 다시 주면 안 되니?”
“아이 참 관장님도!”
“왜? 안 돼? 다음에 너 장가가면 네 색시에게도 말해 줄 건데. 말해도 돼지?”
“아, 몰라요!”
녀석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예전의 녀석은 수련시간에 쉬가 마려우면 발을 동동거렸다. 하는 수 없이 수련을 잠시 멈추고 화장실로 데려가 오줌도 누이고, 감기로 열이 나면 약을 먹여 소파에다 재우고, 체해서 배가 아프다고 울면 손도 따주고, 배도 문질러주고, 젖니가 흔들리면 이도 뽑아주고, 그랬던 그 6살짜리 꼬마가 벌써 커서 멋지고 근사한 청년이 되어 있다. 잘 자란 것 같아 쳐다만 봐도 배가 부르고 흐뭇했다.
나는 검도장을 운영할 때 철칙이 하나 있었다. 절대로 아이들 상대로 상업적으로 돈을 벌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아이들이 맑은 영혼을 갖고 자라서 불의에 굴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나 항상 긴장해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한테 얻는 것이 더 많다. 그 맑고 초롱초롱한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힐링이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