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나는

by 기하소


우리 집에는 몇 안 되는 화분들이 있다.

결혼 초기에는 ‘플랜테리어’를 하고 싶어 집안 곳곳에 식물을 들였다. 푸른 잎 하나가 놓이는 것만으로도 공간이 한결 살아나는 듯해, 작은 화분을 들고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설레었다.


나는 꽃집에 들러 식물을 고르기보다는, 이마트 한쪽 코너에 조용히 진열된 녀석들 중 마음이 가는 걸 집었다. 다이소에서 흙을 사고, 집에 있는 화분에 옮겨 심거나 화분이 없으면 그것마저 함께 사 왔다. 그렇게 마트에서 하나둘씩 데려온 녀석들이 열 개를 넘었을 때쯤, 문득 ‘내가 좋자고 모아둔 녀석들이 오히려 괴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고 했는데, 좁은 화분 속에 갇힌 녀석들은 그 말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집안에서 어떤 녀석은 늘 시들시들했다. 특히 로즈메리는 햇살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했다. 결국 친정 집 마당에 옮겨 심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힘들었던 탓인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몇 번의 작별을 겪고 나서야 나는 다짐했다. ‘화분은 다섯 개를 넘기지 말아야겠구나.’

그 뒤로는 바쁘게 지내느라 식물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잘 자라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주인의 성격을 닮은 건지, 아니면 스스로 생존의 방법을 터득한 건지, 한겨울에도 베란다에서 끄떡없었다. 작은 잎 사이로 피어난 생명력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식물들을 들여다볼 여유가 사라졌다. 몸을 추스르고, 하루하루 아이에게 마음을 쏟느라 녀석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분갈이 시기가 지나도, 잎이 조금 시들어도 그저 흘려보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다시 눈이 식물들을 향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두 번쯤 흙의 촉촉함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잎을 쓰다듬는다. 오늘 낮에도 물을 줘야 했다는 걸 문득 떠올렸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조용히 녀석들에게 물을 주러 갈 생각이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할 수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녀석들을 땅에 심고 가꾸며 작은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다. 어릴 적부터 예쁜 정원을 갖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 마당에 가득 피어 있던 꽃들과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들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때 우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마당을 가꿀 여유가 없었다. 잡초가 자라면 할머니 옆에 앉아 함께 뽑고,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심어 텃밭을 꾸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예쁜 꽃과 나무가 자라는 친구의 정원이 내심 부러웠다.


어쩌면 나는 그때의 그 마당을 마음속에 품은 채, 여전히 녀석들을 키우며 작은 정원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녀석들을 언젠가 더 넓은 자연으로 옮겨줄 수 있도록, 오늘도 천천히 손끝의 온기를 전한다.

언젠가 그 정원에 녀석들과 함께 서 있을 날을, 조용히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