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꽃은 사랑이라
20대의 취업과 직장생활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던 나는 제대로 된 연애한번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가장 사랑하며 불태워야 할 나이에 사랑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꿈이냐 사랑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이상한 질문에 답하자면 망설일 것도 없이 꿈을 선택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사랑을 하면 안 될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식의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이 나의 인생관으로 못 박이게 된 데에는 안정적이지 않은 20대 후반의 여자를 대하는 사람들을 바라본 결과였다.
힘들어하는 나를 기다려주지 못한 전 남자친구, 못 이기는 척 나갔던 소개팅에서 별 볼 일 없는 나를 무시했던 사람에 대한 실망, 그리고 현실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실망에서 결국 남는 건 남자에 대한 실망이었다.
페미니스트? 그런 건 나는 알지도 못하는 단어였다.
그저 나는 불안한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고 꿈꾸고 희망을 주는, 말 그대로 나에게 희망을 주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자들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직업도 없이 놀고 있어 보이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고 , 응원해 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남자는 그 남자의 길을 가느라 서로를 돌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기에 그렇게 20대 후반의 나는 점점 사랑을 포기해 가는 중이었다.
고시공부를 하던 중 꿈꿔왔던 남자는, ( 우습지만 윤권의 노래를 들어며 상상 속에 그려놓은 남자는) 시청에 들어가 공직 생활을 하며 내가 사는 현실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실 허황되게 백마 탄 왕자를 기단 린 것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어쭙잖게 맞는 사람과 조건 맞춰하는 결혼을 하노라면 그냥 혼자 살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해 놓아 버리는 것은 정말로 나를 피폐하게 만드는 지름길이었다. 사람은 그 누구와든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사실임을 이제와 돌이켜 보면 알 수 있다.
“어차피 만날 사람 없고 잘 보일 사람 없는걸.. 옷은 사서 머 하고 가꾸면 뭐해...부질없는 낭비일뿐.”
조금도 튀지 않게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가짐은 딱 그만큼의 사람으로만 보이도록 나 스스로 본인을 낮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의 끝은 비극이라고 하지만 자꾸만 없는 욕심까지 비워내면 비움에 끝도 비극이 되는 법이었다. 적당한 욕심과 적당한 욕구, 열정은 인생을 윤택하게 하는데 최소한의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저 마음 깊숙이 어떤 곳에서는 운명이 나타난다는 기대 한 자락이 있었던 것 같다.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아가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팔자에는 분명 누군가 나타난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 마음을 비워내면 채워질 것이 생겨..
그래서였을까? 운명이란 존재가 다가오고 있었다.
운명의 존재는 그 어떤 시련을 이겨내고서도 만나지는 법이었다.
어느 날 경제정책과에 팀장이 새로 온다고 했다. 얼마 전 국가기관으로 파견을 나가 공석으로 있던 팀장자리이다. 젊은 사람이 온다고 했다.
그냥 그렇다. 관심은 없었다.
어느 날 7층으로 인사를 하러 간 나에게 새로운 팀장님께 인사를 하라며 한 주무관님이 인사를 시켜주었다.
“팀장님~~ 우리 수습이에요. 이쁘죠? 하하”
하하 웃으며 듣기 좋은 인사치레를 잘하는 주무관님이었다. 나도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네 ^^ 안녕하세요~”
새로운 팀장님도 어색한 듯 웃으며 인사했다.
내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주 젊은 팀장님이었다. 이 사람은 행정고시 패스를 하여 기획재정부 근무를 하다 이곳으로 넘어온 분이라고 한다.
상사라고는 4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아저씨라 불릴 사람만 보던 나에게 참 신기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이 끝!
왜냐하면 나는 몇 달 전 행정고시 합격자와의 소개팅으로 고시출신자에게 실망 가득한 중이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소개팅 날*****
아침부터 난리 법석이다. 같이 근무하는 도서관 선생님들이 더 들떴다. 유부녀들은 이런 미혼자의 소개팅이 너무나 재미있기 마련인가 보다.
형부가 어찌어찌 주선해 준 소개팅건이 있었다.
형부 : “지금 시청에서 수습하는 사무관들 중 한 명인데... 외모 보지 말고 한번 만나 볼랴?”
나: “외모가 어떻길래? ”
형부: “내 옆 주무관님은 아무리 서울대 나오고 고시패스했어도... 이건 아니라며 주선하지 말라고 했음..
흐흐흐”
참 고민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고민 끝에 번개처럼 진행되어 소개팅 자리에 앉아 있는 나,
이 사람은.. 왜 주선자조차 주저했는지 마주 앉자마자 이해가 갔었다. 외모비하를 하자는 건 아니지만 내 기준에서는 정말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숨이 막히는 건 외모를 제쳐두고라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만함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형부의 얼굴을 생각하며 끝까지 친절하게 대했다.
나에게 취미를 물어본다.
“저는 딱히.. 지금은 취미라고 할만한 게 없어요”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기의 취미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골프 등의 있어 보이는 취미를 이야기하고 싶어 나의 취미는 그냥 예의상 물어본 듯하다.
그래 그런 잘난 척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 골프 안 치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유행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인간의 진짜 됨됨이는 공무원을 지칭하는 본인도 모르게 나오는 단어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실랑이를 하던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이 놈..(이것도 서울이 얼마나 복잡했는지를 설명하며 지방에 살아온 나에게 서울 사람 유세를 하던 중이다.)
억지를 부리던 주차 경비원에게 했다는 말이다.
소개팅남: “저 공무원이에요~ 생각하시는 일반 공무원 아닙니다.”
그러고는 태도가 바뀌었다는 경비아저씨의 썰...
.....................................
나는 있는 힘을 표정관리를 했고 드디어 한계가 찾아왔다.
사실 다른 말은 생각도 안 난다.
'나 그런 그냥 일반공무원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럼 다른 사람은 그냥 그냥 공무원이고 자기는 고시라도 패스했으니 대단한 사람이다! 길을 비켜라 인가??? 암행어사 출도요?? '
삐딱해진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사람의 거만함은 그냥 가벼운 잘난 척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사람의 등급을 매기어 자기를 꼭대기에 올려놓은 사람은 처음 보았다.
당연히 너무나 대단하신 공무원이라 비천한 9급 수습 공무원인 내가 마음에 들리 없었다.
마지막 데려다주는 매너까지 꽝이신 그 대단하신 몸이 이 나라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자들의 얼굴에 먹칠을 해놓았다.
그리하여 두 번째로 만난 행시패스의 젊은 새로운 팀장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먹칠된 색안경을 이미 장착한 후였기에.
그렇게 새로운 젊은 팀장의 등장에도 추레한 차림새로 아침 인사를 다니는 일상을 보냈었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났을까?
어느 날 알 수 없는 번호로 메시지가 하나 왔다.
///안녕하세요. ㅇㅇㅇ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주에 시간 되시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실래요?///
누군지 모르겠다.
ㅇㅇㅇ? 나는 모르고 나를 아는 이 사람.. 매일 보는 사람..
바로 그 팀장이었다.!!
맞아 그 사람 이름이었어!!!
나는 정말 깜짝 놀랐었다. 예상은커녕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다.
머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도 한참을 고민했다.
왜냐하면 바로 잘라 버리기엔 그냥 저녁을 먹자는 것이고,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고민끝에 식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우리 집 여자들이 난리였다! 당장 시간 잡아 저녁을 먹으라는 것이다!!
사실 엄마도 예전 그 소개팅 사건 이후로 혹시 몰라 떨떠름하기는 했지만..
시간을 고르고 골라 어찌어찌 날을 잡아 만나기로 하였다.
팀장이 원하는 시간과 내가 원하는 날이 너무도 달라 팀장이 나의 시간에 맞춰 주었다.
**희한한 팀장.**
같은 시청에서 근무를 하였으니 퇴근 후 팀장의 차를 타고 음식점으로 향했다.
두 달간 ' 안녕하세요'만 하다가 갑자기 단둘이 차를 타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어색하지 않은척도 해본다. 그런데 문제는 어색하게 아니었다.
먼가 이상하다. 표정도 떨떠름하고 앞만 보고 운전한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아니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몰려왔다.
'결국 다 똑같은 남자인데 앞으로 회사생활만 꼬이고 오늘 당장 내 시간만 뺏기는 거 아닐까?'
불길한 마음으로 어색한 대화를 나눴다.
어색함과 이상함에 밥도 맛있지가 않았다. 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
그런데.. 갑자기 폭탄발언?을 한다.
팀장 : “사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
“????”
그렇다. 얼마 전 회사에서 생일인 사람에게 전달해 주라던 상품권. 내가 심부름으로 가져다주지 않았던가.
그게 오늘이구나.!
근데 먼가 씁쓸해 보였다.
여자치고 특별히 이벤트 따위는 싫어하던 나이지만 생일을 그냥 이렇게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마침 유명한 베이커리가 옆에 있어 케이크 하나를 쥐어 보내주었다. 그냥 내 마음 편하자고 한 것이었다.
'매일 봐야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계속해서 친절을 쥐어짜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나름 잘보이고 싶은 마음 조금 첨가한달까?
잘 먹지도 않는다며 극구 말렸지만 나도 나답지 않게 극구 케이크를 사주었고 고맙게 받아간 팀장이다.
그냥 그렇게 무미건조한 듯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지나간 첫 만남이었다.
그 무미건조함이 나의 30년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의 의미로 다가오게 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