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시간을 흘려보내면 잠시 달콤함도 있는거지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남편을 소개한 날, 친구들은 "축하해~"란 말 대신 말했다.
"괜찮겠어?? 남편 좀 쎄보인던데.."
찰나의 당황으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겉보기엔 그래도 별로 안그런데... 내가 더 고집쎄 ㅎㅎㅎ"라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친구들이 시기질투를 숨기지 못하고 들어낸 말이 틀림없었다.
나는 조건만 보자면 대한민국 여자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
그렇다. 바로 그 희한한 팀장과 나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공직계의 신데렐라였다.
9급 공무원으로 들어가 행정고시를 붙은 5급 남편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찾아, 조건만을 찾아 만난 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는 그쪽 사람들이 찾는 조건에 들어갈 수도 없는 여자이다.
대한민국에서 사시패스를 했거나 행시패스를 한 남자와 결혼을 하려면 엄청난 재력이 있거나
똑같은 라인에 서 있거나,, 그 이상이거나
이것이 슬프지만 우리들의 현실이다.
그 당시 나는 너무나 가난했고, 지방대학을 나와 나이 30이 다 되어 그제야 9급 수습을 하고 있는
앞길 걱정이 태산인 여자였다.
그저 언제나 내가 가진 선에서 소탈하게 분수를 지키며 재산은커녕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뿐.
그런 내가 가진 건 긍정적인 마인드와 가슴에 품고 있는 반짝반짝한 꿈이 전부였다.
20대 초반에 공직에 들어가 세상 고민을 혼다 다 짊어지고 난 뒤 꿈을 찾겠다고 한바탕 힘겨운 세상살이를 다 하고 돌아온 나였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지방 9급 시험을 붙어 나이는 좀 많지만 행복하게 수습생활을 하던 때였다.
같이 일하던 어린 동기 여자아이들이 동기 남자들과 함께 놀며 신나는 수습생활을 할 때에도 나는 멀직이서 홀로 수습생활에만 충실하던 때였다.
고된 청춘살이를 한 나에게 공직이라는 울타리는 내 안식처가 되었고 그 안식처가 다음 꿈으로 가게 해주는 징검다리 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 조직에 들어온 것만으로 더이상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과에 팀장님 한분이 파견을 나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젊디 젊은 팀장님이 오게 되었던 것이다.
나보다 결혼한 아주머니들이 더 난리였었다.
웃긴 건 과에서 유일하게 솔로이던 나에게 그 팀장님과 잘해보라는 무언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급이 안된다고 생각했겠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도 안 했다.
그 사람은 그저 내가 아침인사만 하면 되는 팀장님 중 한명일뿐이었다.
이미 소개팅으로 오만하기 짝이 없던 행시패스 남자를 만나봤기 때문에 그쪽 사람들은 여자를 조건으로
저울질한다고 일반화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NO 하고 싶은 상대일 뿐이었다.
첫인사를 마치고 그렇게 인사만 하며 2달이란 세월이 후다닥 지나갔다.
정말로 인사만 했다.
나는 여전히 수습답게 오버하지 않고 초라하게 입고 다녔다.. 사실 멋진 옷을 살 돈이 없었다.
내가 받는 월급은 그저 기본적인 식비와 차비로 끝나버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여전히 퇴근 후 집에서 뒹굴거리며 있던 어느 날,
매일매일 잠만 자는 내 폰이 "띠리링"하고 울렸다.
그 팀장의 문자였고 그렇게 첫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잘 되었냐고? ㅎㅎㅎ
케이크까지 잘 주고 받으며 나름 마무리를 잘하고 헤어진 우리 둘은 서로 2주 동안 시큰둥하게 연락도 안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먼가 피하는 듯한 그 눈빛, 게다가 너무나 피곤해 보이는 그 팀장의 모습에 역시나 실망을 좀 했었고, 그렇기에 나도 덩달아 딱딱하게 대한 삐그덕거리는 저녁식사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 후의 에프터가 없었으므로 내가 먼저 나서서 연락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괜스레 그 저녁식사 때문에 (아무리 잘 마무리하고 들어왔지만) 깔끔히 인사만 하고 지나가면 되었던 내 맘에 가싯거리처럼 불편한 존재가 되어 다가왔다. 평탄하던 내 수습생활에 찬물을 끼얹었다고나 할까...
목에 가시가 박힌 채 생활하던 어느 날 점심시간,
옆자리에서 함께 일하던 여사님과 사무실에서 남은 점심시간을 보내는 데 그 여사님이 말했다.
"아까 들어오는 데 그 팀장님~ 어떤 젊은 여자랑 밥 먹고 들어오던데?? 너 저번에 저녁 같이 먹지 않았어?
그리고 그 이후에 연락 안 했던 거야?"
유일하게 나의 앞길을 걱정하고 챙겨주던 여사님이 결혼생각 없는 나를 안쓰러이 여겨 본인이 더 나를
팀장에게 갖다 붙이려고 했었었다.
//그 팀장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게 맞다면서!
내가 이렇게 곰탱이처럼 가만히 있으니 팀장이 다른 여자 만나려는 거 아니냐며 ~!
요즘엔 그러면 안 된다고 내가 잡아야 한다고 ~ //
나보다 더 길길이 날뛰며 속사포 랩처럼 사태의 심각성을 언급했다.
"아니 저는 머 별로... 생각 없는데...."
그러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나도 생각이 없는 걸까???'
목에 가싯거리라고 생각만 했지 에프터가 없는 걸 실망해서 기분 나빠하고 불편하고, 그랬던 건 아닐까??
여사님의 부추김에도 저번 소개팅남처럼 정말로 싫었다면 확실한 내 의사를 말했을 텐데 어버버 하는 내 모습에 사실은 마음이 조금은 있었던 나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 머 하는가. 이미 끝나버린걸 ~
나 혼자 포기하려는데 여사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당장 저녁약속 네가 잡아~! 메신저 보내~~~!
저번에 밥 사주셨으니 이번엔 네가 사겠다는 명분으로
보내 빨리!!"
정말 이런 등쌀 오랜만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민원을 정신없이 보다가 결국은 메신저를 차마 보내지 못한 나였다.
짬이 생기자 여사님이 다시 다가왔다.
"보냈어??? "
'아니요'란 내 대답에 등짝 스메싱 한대 날려주며 지금 빨리 보내라고 2차 부추김을 했다.
엄청난 등쌀을 힘입어 용기 내어 쪽지를 날렸다.
전송과 동시에 기다리는 1~2분이 어찌나 길고 두근거리던지... 그리고 답장이 왔다.
---------좋아요!! 저녁 먹고 저 영화표가 있는데 영화도 같이 봐요~!-----------------------------------
오 마이갓!! 너무나 기뻤다.
거절당할 것을 예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저번날 내 이미지가 그리 나쁘진 않았나 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팀장은... 거만한 느낌이 없다. 상대를 좀 배려하는 듯하다.
인사만 했지만 두 달 동안 봐온 팀장에게 오만함은 사실 볼 수 없었다. 그걸 인식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와는 안 되는 상대라며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는 그를 밀어내고 밀어냈었다.
약속을 잡고 나니 꼬깃꼬깃해진 셔츠를 보고 한숨이 절로 났다..
럭셔리한 옷은 못 입더라도 적어도 깨끗한 옷은 입어야 하지 않은가?
민원이 없는 한가한 오후 시간에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며 내 사수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청 옆 패션몰로
뛰어갔다.
'아무거나 깨끗한 티셔츠 한 장만.... 플리즈~~'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며 나의 모든 촉각을 세워 하얀 티셔츠 한 장을 구매했다.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며 후들거리는 다리를 보고 헛웃음이 났다.
내 마음속엔 이미, 잘 보여야 될 존재로 자리 잡은 팀장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팀장님은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했다. 이 지역엔 처음이었으므로 내가 맛집을 찾아내야 했다.
저번 저녁식사는 형식적인 파스타를 먹었으니 이번엔 진짜 맛집을 데려가고자 다짐했다.!
저쪽 멀지 않은 곳에 낙지볶음 맛집이 있었다. 언제나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그곳.
메뉴를 말하니 너무나 좋다며 낙지볶음집으로 2차 만남을 가졌다.
나는 아직 이 사람을 마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너무나 맛있는 이 낙지에 집중한 나머지 내 하얀 티셔츠에 낙지국물이 떨어졌다...
팀장님이 말해줘서 알았다. 평상시에도 음식을 잘 흘리고 먹는 탓에 이런 건 다반사인지라 앗! 하고 휴지로 닦아내고 말았다.
하필 오늘 산 옷이라 그게 조금 아까웠지만 평생을 옷에 흘려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내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어색한 듯, 나름 재미난 듯 영화까지 보고 나서야 헤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번엔 점심도 한번 같이 먹었다. 왜 그런지 사람들 눈을 피해~이상한 소문을 피해~
나의 등쌀여사님과 팀장님은 한 팀이었고, 어느 날 그 팀의 회식자리에 여사님이 나를 굳이 데리고 가셨다.
이전의 회식은 팀장님이 있고 없고 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이번 회식자리는 팀장님의 존재가 상당히 의미가 있었다.
그 사람이 어딜 보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사람들과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눈여겨보면서
회식의 끝은 왔고 조금 이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아쉬움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는데
팀장님이 슬쩍 말했다.
"저희끼리만 2차 갈까요??"
기다렸다는 듯 오케이 사인을 날리고 모두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우리를 눈여겨보던 여사님이 눈치를 채고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주자로 집을 향했다.
두 번의 저녁식사,
처음 술자리..
술자리는 의미가 다르다. 형식적인 이야기만 나누고 얕은 이야기만 나누는 저녁시간이었다면 이번 술자리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팀장님이 보는 회사에서 내 이미지가 어떤지...
내가 처음 본 팀장님은 어땠는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깊어지는 밤만큼 내 마음도 이 사람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술기운인지 모르겠지만 기대고 싶기도 했다.
팀장은 정말 내가 생각한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내가 일반화시킨 행정고시 패스한 사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이야기를 나눌수록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신기하게도 모든 걸 다 가진 이 남자가 나와 통하는 게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따뜻함..
그렇게 궁금증이 더해질수록 내 마음도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만나고 회사만 돌아오면 우리들의 관계도 달라질 것 없이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여전히 인사만 하는 사이, 따로 문자를 주고받지는 않는 사이, 누가 먼저 밥 먹자고 하면 먹긴 먹는 사이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생각했다.
'먼가 맞는 거 같지만 확 끌어당기는 한방이 없나?? 아니면 내가 너무 조건이 안되는 거 같아서?? 밀당하나?'
이런저런 생각의 끝엔 아쉬움과 후회와 원망이 뒤섞인 감정 덩어리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나의 수습기간 종료일도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