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 자고 떠나야지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뗏기간의 여파로 숙소는 마땅치 않았고 거기에 내 게으름까지 더해져 터 언니집에서 며칠 더 눌러앉게 되었다. 언니도 더 있다 가라며 오히려 떠나려 하니 서운해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보냈고 어느새 나는 그 집 둘째 딸내미가 되어 있었다.
'베트남 남자와 결혼하세요.'
아침 조깅을 나가는 길에 아저씨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번역기를 내밀었다. 이럴 거면 베트남 남자와 결혼해서 여기 살으라는 것이었다.
괜찮은 사람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해변가를 달리며 생각했다. 그때 나트랑에서의 생활은 어느 때 보다도 안정적이고 기쁨으로 충만했다. 지금 지내고 있는 터언니 가족들이 좋았고 해변도시가 주는 활기참이 좋았다. 밤이 되면 내 방 창문으로 생생히 들려오는 파도소리도 좋았다. 아침엔 언니가 내가 좋아하는 반미를 출근하기 전에 사다 주었고 아주머니는 그걸 반쯩과 함께 내어주셨다.
잘 먹고, 잘 돌아다녔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바닷가를 따라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도 보고 근처 포나가르 사원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리를 건너 지원언니도 만났다. 예전에 같이 묵던 숙소 로비에서 만난 언니는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전날밤 숙소에서 베드버그가 나와 다들 로비소파에서 잠을 잤단다. 다행히 언니는 나트랑에서 사귀게 된 남자친구 집에서 있었는데, 새벽에 남자친구가 출근하면서 자신을 같이 내쫓더라나. 언니는 세탁한 옷 봉지를 툭툭 치고는 노숙자 신새가 따로 없다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지연은 얼굴이 동그래졌어."
언니는 송곳니가 잘 보이게 웃었다. 나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터 언니 집에서 사육당하는 중이라고 우스갰소리를 했다.
점심때가 되어 언니와 나는 그리스 식당에 갔다. 케밥과 샐러드를 나란히 시켜 놓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해변가를 좀 걷다 결국엔 또 식당가로 접어들어 계속 음식을 탐구했다.
분에 넘치면 결국 탈이 나는 법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나의 소화력이 다음 날 고장이 났다. 제일 큰 원인은 터 언니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을 때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탓이었다.
언니는 출근한 중에 부모님과 말이 통해야 말이지. 집에 얹혀 지내는 중에 언제 밥을 먹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배가 고프면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라면 따위를 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가 점심 먹으러 내려오란다. 배도 안 고프고 그냥 맛만 보자고 생각하고 내려갔는데 주는 데로 덥석 덥석 받아먹다 얹혔다.
하필 그날은 언니가 퇴근하고 같이 동네 맛집 탐방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언니 집에서 밥을 먹고 얹혔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그냥 배가 고프지 않아 다음에 가자고 말하곤 혼자 방에서 끙끙댔다.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오한이 일었고 온몸이 가시 돋친 듯 쑤셨다. 그렇게 옅은 잠에 들다 깨기를 여러 번, 날이 밝은 데로 이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가 출근한 아침, 나는 짐을 꾸려 1층으로 내려와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배웅을 나온 아주머니는 내 볼에 입을 맞추었고 눈시울을 붉히셨다. 아저씨는 나를 유심칩 가게까지 태워다 주셨다.
"바이바이, 파파."
그렇게 나는 다시 끈 떨어진 연처럼 길거리를 한동안 배회했다. 곧장 숙소로 가고 싶었건만 하필 유심칩 기한이 다 되어 해결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날은 뜨겁고 속은 울렁거렸으며, 목은 타들어갔다. 더 이상 세상이 아름답지 않아 보였다.
그당시 나는 반나절 가까이 아무것도 못 먹고 전부 쏟아낸 상태였다. 포카리스웨터만 하나 사들고숙소에 들어갔다. 개인실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이곤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무도 눈치볼일 없으니 몸은 아파도 마음만은 편했다. 그렇게 해가질 무렵, 터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죽을 사 왔으니 내려오라는문자였다.
불과 어제본 언니의 얼굴이지만 오랜만에 본 것처럼 반가웠다. 언니는 내게 녹색 야채죽을 내밀었다.
"몸은 좀 어때? 일하는 중에 아빠 문자 왔어. 너 어디로 갔나 잘 갔나 걱정하시더라."
나는 멋쩍게 웃으며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 언니는 배탈에 좋은 약과 음식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구아바 잎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했는데 나는 구아바를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괜찮으면 내일 같이 저녁 먹자. 소화 잘 되는 음식이 무언가 생각해 볼게."
그렇게 언니와 헤어져 방안에 들어와 죽을 한 술 떴다. 가슴 한편이 따스해졌다. 언니가 아니었더라면 죽집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
다음날 언니는 언니 남편과 친구 한 명을 더 데리고 내 숙소에 와있었다. 그리고 카페로 향하는 중에 언니는 내게 말했다.
"우리도 너와 같이 달랏에 갈 거야."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내 다음여행지 달랏을 터언니 부부와 또 다른 친구 부부까지 총 다섯이서 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