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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r 19. 2024

5장. 합석

불편한 합석, 그리고 산책

어쩌다 합석한 외국인과 공원 산책을 갔다. 영어도 짧은 내가, 그 시간 동안 그와 무슨 대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날은 모든 것이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날이었다.


전날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 떠드느라 기력을 다 써버렸는지,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컨디션이 영 아니다 보니 벌써 내일 있을 투어까지 걱정이 되었다. 도대체 그동안 회사를 어떻게 다녔던 것이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해 왔던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아침이었다.


오전 10시 반,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는지 겨우 몸을 일으켜 ‘오늘은 돌아다니지 말자’하는 마음으로 대충 씻고 제일 편한 옷을 입고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애매한 시단 대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2층까지 있는 식당인데 모든 테이블이 다 차 있었다. 다른 곳을 갈까 하다, 식당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알면서도 자리가 없냐고 물었다(바로 돌아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은 마치 자리가 당연히 있다는 듯 테라스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합석을 하라 했고, 얼떨결에 테라스 쪽을 쭉 훑었다. 한국인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앉겠는데, 뭐 다 외국인이라 고를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아무 데나 앉아야겠다 싶어 제일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앞에 서니 다행히 먼저 앉아 있는 외국인이 앉으라며 손짓했다. 사실, 쭉 훑어볼 때 그의 모습이 어딘가 좀 뚱해 보여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아 선택한 것인데, 실패였다. 여긴 한국이 아니었지...


그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서 왔냐고 물었고,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안녕하세요”라며 인사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망했다’를 되뇌었다. 일단 나는 영어가 매우 짧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외국인을 상대하려면 꽤나 많은 기력이 필요했기에 그날의 컨디션으로는 어떤 만남도 환영할 수가 없었다. 뭐 어찌 됐든, 이 밥시간만 잘 버텨보자는 마음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여행자들의 대화(이곳에 언제 왔고, 얼마나 머무는지 등)를 나눈 뒤, 나는 먼저 영어를 잘 못한다고 그리고 오늘 나는 매우 피곤한 상태라며 최대한 대화를 줄여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는 본인의 한국어 수준(‘안녕하세요’ 밖에 못했다)과 비교하면 이 정도면 잘하는 것이라며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칭찬했고, 이후 눈치 없이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나의 리액션을 기다렸다. 여행의 수준이 좀 다르긴 했다. 그의 사진첩에는 로키 산맥 등 높고 험한 산을 오르고, 연어를 잡는 곰을 포착하고 직접 버섯을 채집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나도 나름 여행 좀 한다고 했는데, 어째 내 사진에는 생동감이 떨어져 보였다. 나보다는 분명 어릴 텐데, 나보다 좋은 경험들을 많이 했구나 싶어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쉴 새 없는 여행 사진 폭격에 점점 지쳐갔다. 왜 음식은 아직도 나오지 않는 거야.  


한참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쯤(?) 그는 내 나이를 물었고 잠깐 내 나이를 생각한 후 대답해 주었다. “뭐라고? “ 내 대답을 들은 그는 놀라며 잠깐 헛웃음을 짓더니 “22살쯤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란 인간이란...


각자 나온 음식들을 먹으면서도 그의 질문은 멈출 생각이 없었고, 나도 열심히 답해주며 “앤 유?”로 대화를 이어갔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나는 이 만남을 마무리하기 위해 오늘 어디 갈 것이냐고(그리고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할 참이었다) 물었다. 그는 아무 계획이 없고 네가 시간이 된다면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했다며 이어 약간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그런데 너 오늘 쉬고 싶다고 했으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 내 약점을 건들다니. 나의 밑도 끝도 없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아냐, 나 시간 있어“라고 답해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공원 산책을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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