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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r 26. 2024

6장. 상사

합석 그 이후

합석의 기억은 생각보다 강렬했고, 나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친구에게 연락했다.

”있잖아, 자꾸 존이 생각나“

*합석한 외국인의 이름은 존이었다


그날, 존과 나는 2시간가량 공원을 산책하며 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이미 식사 중에도 많은 얘기가 오갔지만). 그가 지금까지 했던 직업, 형제가 많은 가족, 전 여친과의 이별, 몸 구석구석 자리한 타투의 의미, 그리고 인종차별,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 등... 평소였으면 나는 ‘이 친구 참 말이 많구나’라고 하며 그의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그가 쓰는 언어가 영어라 그랬을까.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잘 듣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존은 열심히 이야기하다 내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으면 다시 쉬운 단어로 말했다. 내가 모를 것 같은 단어는 그 단어의 의미를 내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끝에는 나의 의견을 물어보고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존의 질문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도 나름 대화를 주도할 줄 아는 사람인데,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 짧은 시간 동안 존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하필,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었고 치앙마이에 도착한 이례로 가장 더운 날이었기에 나의 체력과 정신력은 바닥을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 해도 원래의 나라면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해, 그리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지치더라도 지하 끝 에너지를 어떻게든 끌어 모아 그 시간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편한 마음이 얼른 숙소로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존의 기분은 중요하지 않았고 이 자리를 얼른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정말 도망가듯 급히 존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까지도 존은 나에게 따뜻한 말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얼른 침대에 누웠다. 마치 관에 들어간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아주 가만히 천장을 보며 누워있었다. 한참 뒤에야 정신이 번듯하더니 몸을 앉혔다. 바로 몇 시간 전이 꿈같이 느껴졌다.




다음날, 나는 외곽도시 투어를 위해 새벽같이 움직였다. 투어가 늘 그렇듯, 도착하면 내리고 시간 되면 출발하고를 반복하며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존은 푸켓에 잘 도착했나’, ‘존이 봤으면 좋아했겠다’, ‘존도 동물 좋아하는데’ 등 어딜 가나 존을 생각했다. 어제의 대화가 너무 생생했기에 그롤 수 있지를 생각하며 나의 그런 잡념을 애써 무시했다. 아니, 그런데 그 이후에도 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장소를 지나가도, 무엇을 하든 존이 생각났다.


이런 내가 너무 어색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자꾸 존이 생각나”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박장대소를 했고 나도 같이 웃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애들이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게 나는 너무 어색했고 그저 웃겼다. 내 얘기를 듣던 친구는 ‘그러게 왜 그렇게 헤어졌냐, 연락처라도 받질 그랬냐’며 존을 찾을 방법이 없을까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나는 안타까우면 어쩔 것이냐, 연락처를 받았어도 어쩔 것이냐며 웃어넘겼지만, 그날의 마지막 인사는 왜 그런 식으로 했는지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자 보내는 시간 동안 나는 평소와 달랐던 그날의 나를 복귀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이따금 그날을 곱씹으며 깨달았다. 존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어떤 것이며, 여행을 하는 목적 등 아주 쉬운 것들인데, 막상 나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서도 왜 그 색을 좋아하는지도 설명하질 못했다. ‘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현재의 직업을 선택한 이유를 잊었고, 직업적 목표를 잃어도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시점부터 나는 그냥 살아왔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버벅거리는 내가(영어의 부족함도 있었겠지만) 그 앞에서 너무 작아 보였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보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고, 그 누군가를 위한 내 것이 아닌 답만을 해왔다. 그래서 존과의 대화에서 나는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이 스스로 너무 창피했었던 거다. 그래서 그토록 얼른 그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었다.


나의 이상 행동에 대한 분석이 끝나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졌다. 이제부터 내가 무엇을 하면 될지가 명확해졌다.

나를 찾아가는 것, 오직 나를 채워가는 일을 하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를 하나씩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에게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나에 대해 다시 알아가고 채워가니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에너지를 채워가며 매일 나에 대한 새로운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따금 나는 존에 대해 생각한다. 언젠가 존에게 닿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말하고 싶다. 덕분에 나를 찾아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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