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이유있는 ‘할아버지·아버지 선긋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 2월 2일 유제품 생산 농장을 시찰하는 가운데 선대 지도자인 할아버지 김일성의 정책에 대해 평가절하했다. 해당 발언은 평안북도농촌경리위원회 삼광축산농장 조업식에서 다양한 유제품의 성공적인 출하를 치하하며 한 연설에서 나온 것이 그 배경이다. 연설에서 김정은은 “1964년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농촌 건설의 기본 원칙인 ‘사회주의 농촌테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면서 “반세기 이상의 투쟁에도 우리 농촌들이 왜 피폐한 상태를 가시지 못했는지 다시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하며 김일성 정책을 폄하하였다.

북한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은 최고지도자의 발언, 특히나 선대 수령의 어록과 업적은 절대 비판할 수 없는 성역화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기초적인 사실이며, 북한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각종 연설 및 발언들을 집대성해 수십권의 책으로 편찬하고, 또 대부분의 공식적인 문헌, 심지어 북한의 대학원에서 편찬되는 과학적 논문에서조차도 서두에 선대 지도자들이 했던 관련 어록을 인용하며 글들을 시작할 정도로 그 권위가 절대적이었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의 선대업적 폄하 발언은 어떠한 목적에서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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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백두, 50% 후지산’, ‘섞인 피’ 김정은, 선대를 낮춰야 내가 높아진다.

김정은의 불완전한 3대세습은 그의 어머니 고영희로 시작된다. 고영희는 김정일의 세 번째 여인으로, 김정은은 ‘첩’의 아들이다. 더군다나 고영희는 재일교포인데, 재일교포는 이른바 ‘째포’라 불리며 오랫동안 감시와 차별의 대상이 되는 등 백두혈통과는 정 반대되는 계층이다. 혈통에 의한 세습에 정당성을 두는 기존의 ‘유일적 령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김정은의 세습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후지산 혈통’이 섞인 김정은의 출발이 치명적인 결함임을 지적하도록 작동하게 된다.

치밀한 형식적 이론과 명분을 중요시하는 공산·사회주의 국가에게 원칙은 굉장히 중요하다. 정밀한 원칙에 결함이 발견된다면, 그 원칙을 새로운 논리로 치열하게 보강하거나, 커다란 ‘업적 정당성’을 내세워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방법을 쓸 수 있다. 이것이 김정은은 집권 이후 그토록 핵 개발에 전력투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북한은 이미 실전에 사용할 수 있는 핵을 어느정도 축적 한 것으로 평가한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핵 무력이 완성되었음을 헌법·핵무력에 관한 법률로 공식화하고 있다. 핵무력이야말로 김정은에게는 큰 ‘자존심’이자 기존 혼탁한 뿌리를 대체할 수 있는 ‘업적 정당성’이 되는 것이다.

김정은이 할아버지인 김일성의 ‘농촌테제’를 비판한 것은, 반쪽짜리 백두혈통인 자신에게, 강조할수록 불완전성이 밝혀지는 선대의 후광보다는 ‘김정은’이라는 독자브랜드를 강조하는 정치적 홀로서기다. 이를 대표하는 몇가지 사례는 김일성 생일을 일컫는 ‘태양절’ 명칭을 대신해 ‘4월 명절’로 그 의미를 축소해 부르거나,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성절’을 대신해 ‘2.16’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주체113(2024)년’ 등으로 쓰이던 주체연호의 사용을 로동신문에 이어 우표 및 달력에서도 삭제되는 정황이 발견되었고, 그 공간을 국제적인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하는 모습이 발견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 딸 김주애를 위하여?

선대 백두혈통을 절대시하는 관례에서 벗어나 김정은의 독자 브랜드를 강화하는 것은 4대 세습에도 도움이 된다. ‘백두·후지산’혈통의 3대 세습도 논란인데, 4대 세습에 와서는 혈통 기반의 세습 정당성은 더욱이 약해질 전망이다.

최근 북한의 관영 매체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김정은의 딸 김주애다. 국정원발 기사를 살펴보면, 기관에서는 김주애를 4대세습의 주인공으로 평가하는 흐름이 자주 발견된다. 물론 첩의 아들이던 김정은이 3대 지도자로 전격 발탁된 전례를 생각하면, 김주애가 4대 지도자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북한의 관영매체에 주요하게 그녀의 모습들이 강조되는 현실에서 마냥 4대 지도자가 아니라고도 주장할 수 없다.

김주애가 되었든, 미지의 숨겨진 자녀가 되었든 4대 세습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김정은이 할 수 있는 노력 중 하나는 혈통 중심의 정당성을 파훼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전체적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김정은의 ’할아버지·아버지‘선긋기에는 그 이유가 일견 읽히기도 한다.




# 이종길 작가는..?

한민족글로벌통일포럼 대표이자 북한학 박사, 러시아/CIS지역학 석사(휴학), 경영학 석사, 노어노문학사, 경영학 학사를 학문적 백그라운드로 두고 있는 통섭형 사회과학 박사입니다. 북한 등 사회과학과 관련한 다양한 아젠다들, 인생 이야기, 대학원 이야기, 삶과 철학 이야기, 신변잡기 등을 글로 녹여내어 독자들과 소통하고 소정의 흥미와 가치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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