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Before & After
앞서 우리 커플의 과거 모습과 지금 모습을 대비시켜 살펴본 바 있다. 이제는 <5분 혼잣말>을 통해 ‘나에게’ 어떤 효과가 발생했는지를 알려주겠다. 아래와 같은 변화가 있었기에 우리는 과거의 모습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5분 혼잣말>을 하기 전에는 여자친구의 잘못만을 지적했다. 여기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게 바로 모든 싸움의 원인이다. 우리는 싸울 때 “네가 이렇게 말해서 그때 기분이 나빴잖아,” “네가 그때 그렇게 행동했으면 안 됐잖아,” “네가 애초에 화를 먼저 냈잖아”라며 상대방이 내게 사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5분 혼잣말>은 상대방의 행위가 아닌 오로지 나의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상대방의 잘못에만 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즉, <5분 혼잣말>은 나 자신을 제삼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나는 <5분 혼잣말>을 하다가 상대방의 행위에 오롯이 모든 정신이 집중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란 적이 많다. 이를 알아차리면, 이내 나의 잘못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더 직접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예시를 들어주겠다. 과거 나는 “네가 자꾸 짜증을 내니까 난 너무 지친다”식의 표현을 자주 했었다. <5분 혼잣말>을 하기 전까지 이 말의 문제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문제의 원인은 짜증을 내는 여자친구에게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5분 혼잣말>을 시작하고 난 뒤로 나는 우리 관계를 진정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건 여자친구의 짜증이 아니라 나의 지친다는 표현임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나는 여자친구의 짜증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우리 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언어습관을 고치는 데 주력했다.
나는 원래 다혈질이었다. 평소에는 온순하고 부드럽지만 화가 나는 상황에서는 마음속에 불꽃이 확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 물불 안 가리고 화를 내곤 했다. 그런데 <5분 혼잣말>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어느 상황에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법을 익혔다. 여자친구가 내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도 그에 대응하지 않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낸다는 게 어색해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내 마음에 스파크가 튀는 그 순간을 경험하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지금은 이 마음의 평온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내가 화를 도무지 내지 않으니 우리가 싸우는 일도 없다.
역학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상대방과 나의 대립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5분 혼잣말>을 시작하게 되면 이 대립관계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무언가를 강력하게 주장할 때 나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게 된다.
아주 사소한 대화라도 의견을 주고받다가 어느덧 서로의 가치관 대립으로 이어진 적이 있을 것이다. 휴지를 아껴 써야 한다거나 화장실에서 남자가 앉아서 소변을 보아야 한다는 식의 작은 논쟁거리부터, 정치적 견해나 종교적 견해, 성 소수자의 권리 문제와 같은 큰 주제에 대해 상대방이 열변을 토할 때가 있다. <5분 혼잣말>을 통한 반복적인 성찰을 통해, 이처럼 상대방의 주장이 강할 때에는 가만히 있어야 함을 배웠다. 이럴 때 나도 똑같이 내 의견을 피력한다면 상대방과 대립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렇게 난 의견을 주장해야 할 때와 주장하면 안 되는 때를 냉철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됐다. 이게 가능해진 이유는 감정이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매사에 감정이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역학관계를 침착하게 관찰할 수 있다. <5분 혼잣말>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분노를 참는 건 작은 포대에 계속 물건을 욱여넣는 것과 같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은 분노는 반드시 나중에 한 번에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화가 마음속에 일어나도 꾹꾹 참는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 표정도 안 좋아져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슨 근심이라도 있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면서 ‘화병’이란 게 생긴다. 그러나 <5분 혼잣말>은 분노를 참게 하지 않고 흘려보낼 수 있도록 만든다.
예전에 나는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자, 지적하고 싶은 게 있어도 일부러 꾹꾹 참았다. 그러면서 정작 다른 사유로 싸우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하는 날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일부러 화 안 내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과거의 일을 들추어냄으로써 오히려 싸움을 증폭시키곤 했다.
그러나 <5분 혼잣말>을 시작한 뒤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달하면서, 여기에 내재된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턴 서운함이나 분노를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고 흘려보내는 연습을 했다. 과거에는 서운함과 분노가 며칠 동안 마음에 남아있었다면, 이제는 몇 분만 지나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담아두는 게 없으니 과거의 일을 소환해서 여자친구를 타박하는 일이 없어졌다. 나는 분명 뒤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어느덧 뒤끝이 없는 사람이 됐다. <5분 혼잣말>로 뒤끝이 없는 사람이 되는 법은 3부에서 다룬다.
오랜 기간 사귀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곤 한다. “두 분은 안 싸우세요?”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과거엔 엄청 싸웠는데 지금은 전혀 싸우지 않아요.” 싸우지 않는 게 이젠 나의 자랑이 되었다.
<5분 혼잣말>을 연습하면서 싸우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반두라가 말했던 ‘자기 효능감’이 극대화된다. 작은 성공(Small Success)의 경험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 성공의 경험이 반복되면 우리 관계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강화된다. 이 신뢰와 자부심은 다시 우리 관계에 역으로 영향을 미친다. 즉, 더 싸우지 않으려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선순환을 그리면서 <5분 혼잣말>을 통해 전혀 싸우지 않는 커플로 거듭나게 된다.
여러분은 인격에도 단계가 나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툭하면 화를 내는 인성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인성에 속한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인성은 가장 높은 수준의 인성에 속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인성에도 단계가 나뉘어 있다고? 웃기시네. 모든 인격은 평등해!” 아니다. 모든 인격은 평등하지 않다. 인격에도 층위가 나뉘어 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고타마 싯다르타’가 신의 경지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했기에 우리는 그를 두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즉,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와 같은 경지가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인격에도 발전 단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즉, 상대방이 화를 내더라도 빙긋이 웃어주는 싯다르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장 최고 단계에 속한 인격 수준이다.
또한 여러분이 예수를 신이나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인격에도 발전 단계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류를 위해 직접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을 희생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경외감을 느낀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타인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다는 것은 미친 짓이니까. 또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을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때[i] 혀를 내두른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용서해달라는 그의 태도는 그를 다른 차원의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화내는 법이 없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진심 어린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반면, 별것 아닌 일에 짜증을 내거나 성질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눈살을 찌푸린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다 인격에도 발전 단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5분 혼잣말>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흔들림 없는 평온을 유지하게 해 주어 종국에는 인격적 성장을 이루게 한다.
<5분 혼잣말>을 훈련한 뒤로 나는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전혀 다투지 않게 됐다. 기존에는 욱하는 내 감정을 못 이겨 직설적으로 말하는 통에 부모님과도, 친구들과도 꽤나 많이 다퉜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친구에게 그런 것처럼 부모님과 친구들에게도 화를 내지 않는다. 물론 마음속으로 욱 하는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지만 그걸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터득한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인격의 발전이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나 자신도 사랑하게 됐습니다”라는 의미와 같다.[ii]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그 외 나머지 것들에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iii] 나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연애를 통해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성장하는 단계에 있다. 그렇기에 <5분 혼잣말>을 놓지 못하고 계속 진행 중이다. 내가 동경하던 성인의 반열에 오른 그들의 인격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참조문헌]
[i] 누가복음 23장 34절
[ii]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p.75
[iii]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p.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