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솝 Oct 30. 2022

<5분 혼잣말>에 관한 철학적 근거 #1

기독교 철학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 두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기독교와 불교다. 기독교는 서양 세계를 2천 년이 넘게 지배해오고 있으며, 불교는 동양에서 지배적인 종교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엔 서양 문화에도 깊이 스며들고 있다. 이 챕터에서는 <5분 혼잣말>이 인류의 위대한 두 종교가 암시하는 중요한 통찰이 담긴 관계 개선 방법이라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우선 5분 혼잣말의 ‘종교적 근거’라고 하지 않고 ‘철학적 근거’라고 말한 이유를 짚고 넘어가자. 종교적 관점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그 종교 내부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각 종교에서 믿는 절대자의 존재와 각 종교에서 받드는 경전의 신빙성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은 각 종교가 믿는 절대자나 초자연적인 형상들을 신봉하지 않는 외부적 관점에서 각 종교가 지닌 의미를 짚어 나간다. 이를테면 기독교에서 예수가 신의 아들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예수의 행적이 가지는 인문학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하에서의 논의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인 관점에서 각 종교를 분석한 것이다.


위 세 종교가 <5분 혼잣말>의 탄생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수천 수백 년 간 인류를 사상적으로 지배해왔던 이 종교들의 창시자들, 즉 예수와 싯다르타는 소위 ‘깨달음을 얻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지혜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쳤다. 무엇보다 이 종교들은 이 창시자들의 아이디어에서만 전부 도출된 것이 아니다.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이 세대를 거치며 다듬고 변형한, 소위 말해 ‘집단지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종교에서 말하는 통찰이 <5분 혼잣말>을 지지해준다면, <5분 혼잣말>은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훌륭한 아이디어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5분 혼잣말>의 철학적 근거는 이 메커니즘에서 2번 동그라미와 관련이 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관계가 변화하기 위해선 내가 먼저 변화해야 한다고(즉, 나의 뇌가 변화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아래에서 살펴봄으로써 <5분 혼잣말>이 인류의 소중한 지혜와 통찰을 이념적 근거로 한 행동 개선책임을 확인할 것이다.


논의에 앞서 <5분 혼잣말>은 실제로 이 종교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탄생된 것임을 밝힌다. 내 사랑하는 연인과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반복적인 다툼에서, 나에게 큰 의지가 되고 영감을 주었던 건 바로 이 지성이 별처럼 빛나는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이었다.





기독교 철학 : 관계 개선을 위해선 한없이 약해져라


약함은 최고의 미덕이다.


유대교가 기독교로 탈바꿈하여 오늘날까지 서양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예수라는 인물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당시에는 유대교가 원시 사회에 적합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신 야훼는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사람들을 유황 불로 가차 없이 죽이고, 모세를 위해 이집트 군사들을 홍해로 쓸어버렸으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도록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 구약성경 속 야훼의 말을 보면 그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출애굽기 32장 27절).”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사무엘하 24장 15절).”


오늘날 ‘사랑의 종교’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신이 실제로 행한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행적들이 구약성경 속에 기재되어 있다. 이는 곧 구약성경의 신이 유대 민족만을 위한 배타적 신이었으며, 따라서 유대 민족이 원시 사회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을 지닌 신이었음을 방증한다. 그렇기에 구약성경 속 신은 잔인하고, 편협한 성격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예수의 등장과 더불어 기독교는 비로소 희생정신과 봉사정신, 합리성과 배려 등의 덕목을 갖추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약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의 야훼가 강함의 상징, 무자비함의 상징,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었다면, 예수는 완전히 정반대다. 예수는 약함의 상징, 용서의 상징, 전 인류를 위한 신이다.


예수가 약함의 상징인 이유는 그의 특별한 구원 방식 때문이다. 예수는 기존의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를 깨고 스스로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인류 구원에 나섰다. 과거 유대 민족 사이에서는 전설이 한 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메시아(구원자)가 이 세상에 내려와 유대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전설이었다. 정복 전쟁이 빈번하던 과거 원시 사회에 놓여있던 유대인 민족은 당연히 메시아가 무력으로 그들을 당시 로마의 압정 하에서 구원해 주리라 믿었다. 


예수는 삼십 세쯤 되어 본격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강연을 시작했다.[i] 그는 누가 봐도 유대 민족이 기다려왔던 메시아임이 분명했다그는 당시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굉장한 스타였고어딘가 남들과 다른 통찰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요한복음 12장 12-13절).”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요한복음 7장 31절).”


이동할 때마다 수많은 군중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지닌 이 인물이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달갑게 보일 리 만무했다. 결국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끔찍한 죽임을 당한다. 지금으로 치면 모든 대중들이 다 아는 스타 연예인이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한 셈이다. 당시에 그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에게는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로마의 공권력에 무너진 셈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머지않아 제자들에 의해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음’으로 탈바꿈된다. 성경은 예수가 무력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다는 굉장히 특이한 방식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베드로전서 2장 21-24절).”


즉, 관계 개선을 위해선 약해져야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전에는 인간의 죄로 인해 신과 인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인간은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없었고, 제사장이라고 하는 선택된 이들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한없이 약해짐으로써(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인간의 죄는 용서받게 되고 신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신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예수는 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낸 그의 아들이자, 신 그 자체다. 그 신이 직접 육신을 입고 내려와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상태에서,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이 보는 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당대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한 것이다. 기독교의 신이 약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음으로써, 기독교는 ‘약함의 종교’가 된 것이다.


19세기에 등장해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철학자 니체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가치 판단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과거 ‘강함’의 상징이었던 구약성경 속 신 야훼에 대해서는 찬미했던 반면, 신약성경 속 ‘약함’의 상징인 예수에 대해서는 혐오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신의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유대인의 구약성서 안에는 거대한 양식의 인간의 사물, 말이 존재하는데, 그리스와 인도의 문헌에는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 신약성서에는 매우 애정이 깊지만 둔감한 거짓 신자의 냄새와 소인의 냄새가 많이 들어있다(<선악의 저편> 3장 52절).”


니체는 유대민족의 신이었던 야훼에게서는 위대함과 긍지, 정열이 숨어있는 반면, 예수로부터는 왜소함과 열등함, 노예의 도덕이 숨어있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구약성서는 위대함을 기록한 책인 반면, 신약성서는 왜소함을 기록한 책이다.[ii]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니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가 도출되었다. 내 인생은 ‘약함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180도 바뀌었다.




 <5분 혼잣말>에 대한 영감을 준 예수


중국에서 매일 같은 여자친구와의 다툼으로 인해 고통의 절벽에서 몸부림 칠 무렵,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깊었던 나는 성경에서 예수의 행적을 읽다가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다. 마치 내 안의 깜깜한 어둠에서 불빛이 탁 하고 켜지는 느낌이었다. 그 깨달음은 바로, 관계 개선을 위해선 나의 무조건적인 희생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였다.


내 자신이 문득 예수의 행적과 비교되어 보였다. 예수는 신의 아들임에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나아가 온갖 수모를 겪고 죽임 당함으로써 신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개선’했다. 반면, 나는 여자친구와 싸울 때마다 매번 이기려고 애쓰고만 있었다. 갑자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내 수치스러운 행각이 발각되는 순간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곧바로 펜을 들었다. 그리고 내 결심을 적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앞으로는 내가 철저히 깨지겠다.’ <5분 혼잣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5분 혼잣말>이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구체화되진 않았다. 다만 핵심적인 아이디어는 분명했다. ‘싸울 때 이기려고 하지 말고 철저히 지려고만 하자’, ‘여자친구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록 하지 말고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오도록 하자.’ 나는 니체가 말한 것과 달리, 예수의 ‘약함’이야말로 관계 개선의 키(key)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싸우는 순간에 여자친구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내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건 명백히 내 본성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나의 약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제껏 내가 경험해본 적이 없는,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자꾸 실패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여자친구 눈이 아닌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나면, 신기하게도 싸우고 난 뒤에 오히려 개운한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 몇 번이 어려웠지, 계속 시도하니까 약함을 경험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무엇보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니까 우리의 관계가 점차 개선되어갔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전혀 싸우지 않는 오늘의 관계에 이르게 됐다.


기독교가 수많은 비판과 논란 속에서도 2천 년 이상의 명맥을 유지해온 건 다름 아닌 예수의 약함에 대한 속성 때문이다. 어느 민족만을 위한 배타적 종교는 역사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생겨났다가 몰락했다. 예수의 약함이 기독교를 특별한 종교로 만들었고, 따라서 약함은 기독교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운이 좋게도 가장 힘든 시기에 이 사실을 깨달아 <5분 혼잣말>을 고안해낼 수 있었다. 예수의 약함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베드로야, 넌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는 이외에도 내게 관계 개선을 위한 또 하나의 힌트를 주었다. 나는 이 힌트를 <5분 혼잣말>에 융합하여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바로 ‘용서’에 관한 아이디어였다.


성경은 곳곳에서 용서의 가치를 강조한다. 특히 그 창시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용서하는 삶을 직접 선보였다. 성경 속 단연 최고로 꼽히는 장면은, 예수가 자신을 세 번 배신했던 베드로를 세 번 용서하는 장면이다.


예수가 죽기 바로 전날 밤의 이야기는 복음서에서 굉장히 긴박하게 진행된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끈 만큼 예수는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미움을 크게 샀다. 결국 예수는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의 배신으로 기득권층과 군인들에게 포획당한다. 이때 예수의 열성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가 끌려가는 그 모습을 어딘가에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이에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또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당신 예수의 제자 맞네! 내가 봤는데”라고 하자 베드로는 한 번 더 강하게 부인했다. 이윽고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의 제자임을 부인하던 무렵, 그는 끌려가는 예수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때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펑펑 눈물을 쏟는다.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누가복음 22장 60-61절).”


이 둘의 드라마는 예수가 죽임을 당한 이후 다시 부활해 재회하는 장면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예수는 제자들과 아침밥을 먹고 베드로와 마주 보고 앉아 이렇게 묻는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두말하면 잔소리라며, 자신은 예수를 사랑한다고 답한다. 이후 예수는 두 번이나 더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베드로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한다.


예수는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었다. 이로써 예수는 베드로의 죄를 완전히 용서한 셈이다. 사실 예수의 이 용서는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한 것이었다. 일전에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라”라고 한 일이 있었다.[iii] 일흔 번씩 일곱 번즉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이렇게 예수는 베드로가 자신이 죽던 날 자기를 배신했음에도자기가 가르쳤던 대로 베드로를 용서하며 베드로의 마음을 완전히 감화시킨다.


그렇다면 이후에 베드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은 베드로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베드로 행전』과 가톨릭에서 전승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예수의 도를 전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명확하다. 용서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용서는 베드로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이제 나는 용서를 통해 나와 여자친구의 관계를 바꿔 놓을 참이었다. 이 이야기에 깊이 감명받은 나는 용서의 가치를 <5분 혼잣말>에 녹여냈다. 용서의 메시지를 혼잣말 제목으로 만들어 밤마다 이를 반복했다(‘혼잣말 제목’이 무엇인지는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나의 목적은 여자친구가 화를 낼 때 똑같이 되갚으려고 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5분씩 용서하는 메시지를 반복한 결과, 오래 지나지 않아 여자친구의 어떤 언행에도 용서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iv] 라는 예수의 유명한 격언을 들을 때면 우리는 그저 한 위대한 성인이 한 말로 치부한다그리고 나선 우리와는 상관없는 말이라며 외면한다그러나 오른쪽 뺨을 칠 때 왼편도 돌려 대는 이 행위는 실제로 해보면 어떤 신기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다이와 같은 비범한 용서는 때리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이걸 깨닫는 것이 관계 개선을 향한 열쇠다. 


연인과의 ‘극적인’ 관계 개선을 바란다면 지금까지 행동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때 완전히 다른 방식이란, 오른쪽 뺨을 때렸을 때 왼쪽 뺨도 내어줄 정도의 비범한 용서를 말한다. 이런 비범한 용서는 <5분 혼잣말>을 통해 연습이 가능하다.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나는 교회를 다니진 않는다. 성경에 적혀 있는 수많은 기적들과 신의 행적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종교적으로 성경을 대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성경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예수라는 비범한 인물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던 그 영향력에 대해 연구하곤 한다. 약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의 삶은 실제로 시대를 뛰어넘어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예수 덕분에 <5분 혼잣말>을 탄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나와 여자친구의 관계는 180도 바뀌었다. 성경에선 이를 ‘새 사람을 입었다’고 표현한다.


기독교는 성도들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가 대신 속죄되었음을 믿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신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껏 행동해왔던 방식대로 행동해선 안 된다. 완전히 새롭게 행동함으로써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장 22-24절).”


그렇다면 새 사람은 과연 어떤 특징을 가지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 아주 친절히 묘사한다. 새 사람은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도 죄를 짓지 않는다(에베소서 4장 26절). 또한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지 않는다(에베소서 4장 26절). 새 사람은 욕이나 험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에베소서 4장 29절), 상대방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며(에베소서 4장 32절), 상대방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다(에베소서 4장 32절).


이 기준에 비추어볼 때, 나는 <5분 혼잣말>을 하며 완전한 새 사람이 되었다. 나는 분노가 일어나도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지 않고(에베소서 4장 26절), 오랫동안 분노를 품고 있지 않는다(에베소서 4장 26절). 여자친구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들을 더 이상 하지 않고(에베소서 4장 29절), 여자친구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에베소서 4장 32절). 또한 여자친구의 행동에 대해 더 이상 복수하지 않고 용서한다(에베소서 4장 32절). 과거에 습관적으로 여자친구에게 화를 내고 상처 입혔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새로운 나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처럼 나는 위대한 현자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관계 개선의 비책(5분 혼잣말)을 발견했다. <5분 혼잣말>은 우리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기독교 철학에 따르면, 관계 개선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옛 행동방식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즉, 옛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게 된다. 따라서 <5분 혼잣말>은 관계 개선에 대한 기독교의 통찰이 담겨 있는 인류 지혜의 소산인 것이다.




[참조문헌]          

[i] 누가복음 3장 23

[ii] 《선악의 저편》 3장 52, “구약성서에 대한 취향은 위대함과 왜소함을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iii] 마태복음 18장 21-22

[iv] 마태복음 5장 39

이전 12화 <5분 혼잣말>에 관한 과학적 근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