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철학
기독교 철학이 내게 <5분 혼잣말>의 아이디어를 제공해주었다면, 불교 철학은 <5분 혼잣말>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구체화에 도움을 주었는데, ①첫 번째는 관계 개선을 위해선 상대방이 아닌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②또 하나는 ‘관계 개선을 위해선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를 통해 매일 훈련할 수 있도록 <5분 혼잣말>을 설계할 수 있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그 깨달음은 ‘나’라는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들에 비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예컨대 기독교와 같은 일신론적 종교들은 신의 은총이 있어야만 신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하며 신의 가호를 갈구한다. 즉 일신론적 종교에서 우리 인간의 주체성은 미미하다. 반면 불교에서는 내가 잘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여기엔 신의 도움 같은 건 필요치 않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해탈이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i] 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바로 불교의 최종 목표다. 이때 중요한 건 모든 괴로움이 나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해탈에 이르는 것도 나로부터 비롯되고, 괴로움도 나로부터 비롯된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불교 정신을 가장 쉽고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원효대사에 관한 이야기다. 원효대사가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당나라로 향하던 중 깜깜한 밤 중에 동굴에 들어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갈증이 났던 원효대사는 동굴 바닥을 손으로 더듬어 물이 고여 있는 바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 물을 마시자 그 맛이 말할 수 없이 달콤했다. 그런데 이튿날 그 바가지가 다름 아닌 해골바가지였음을 발견하고는 구역질이 났다.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원효대사였음에도 해골을 보는 순간 오로지 더럽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혔던 것이다. 이때 원효대사는 깨달음이 외부의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발길을 돌려 신라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나의 관점이다. 내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났을 때, 슬픔이 일어났을 때,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 그 모든 것은 나의 관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남 탓을 한다. 연애할 때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도 전부 이 남 탓 때문이다. “네가 먼저 짜증 냈잖아”, “네가 먼저 말투를 기분 나쁘게 했잖아”, “네가 그렇게 행동 안 했으면 나도 화 안 냈어”라며 상대방의 잘못만 지적한다. 반면, 나에게 싸움의 원인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싸움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나의 잘못만 인정하고, 시정하면 된다.
나는 <5분 혼잣말>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이 원리를 적용했다. <5분 혼잣말>은 싸울 때마다 원인 분석 단계를 거친다(원인 분석 단계에 대해서는 3장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이 원인 분석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더 이상 남 탓을 하지 않게 되므로, 싸우는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과거에 나는 오로지 여자친구의 행동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여자친구의 말투를 트집 잡아 싸움이 일어났고, 여자친구가 내게 화를 냈다는 것을 트집 잡아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5분 혼잣말>을 시작한 뒤로 나는 내 마음에서 화가 솟구친 게 여자친구 때문이 아닌 나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깨달음을 얻은 후 매일 혼잣말을 반복하면서 싸우는 원인이 나에게 있음을 상기시켰다. 이제 나는 나에게서 갈등의 원인을 찾는 것이 완전히 습관화되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전혀 싸우지 않는다.
이렇게 불교의 지혜를 <5분 혼잣말>에 접목시킨 결과, <5분 혼잣말>은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검증된 관계 개선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해탈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5분 혼잣말>의 메커니즘도 이와 같다. 우리는 <5분 혼잣말>을 통해 다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관계 회복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는 수행을 강조한다. 수행은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의 카르마(karma, 업식)를 알아차리고 이것을 끊어내는 행위다. 카르마에 대해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카르마란 우리 몸에 밴 습관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카르마를 일상 언어로 ‘무의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본인의 카르마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의식에 따라 살아간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습관,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연애 상대방을 선택할 때의 기준, 고통을 대하는 태도 등이 전부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처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카르마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ii]
그런데 최근 들어, 카르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나 자신이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서점에 가면 ‘마음 챙김’을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명상 관련 유튜버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불교의 마음 챙김 수행이 몇 년 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마음챙김이나 명상과 같은 수행이 카르마를 끊어내고 우리 자신이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카르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2600년 전 히말라야산 기슭 작은 왕국에서 태어난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 덕택이다.
싯다르타는 본래 태어나기를 연민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는 세금을 내야 해서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농부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는 땅의 벌레가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을 보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 덕택에 일생을 괴로워하던 싯다르타는 태자로서의 풍족한 삶과 안정적인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29세 되는 어느 날, 이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깨달음을 구하고자 출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왕궁 밖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 역시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스승으로 모셔도 보고, 효험이 상당하다는 온갖 수행법을 다 따라 하기도 해 봤다. 어떤 날은 삶의 고통을 없애려는 일념 하에 호흡을 오랫동안 참다가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iii]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하던 것만큼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해탈을 위해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었다.[iv] 이 모든 경험의 토대 위에서, 싯다르타는 출가한 지 6년 만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다 대각大覺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한 싯다르타는 자신이 깨달은 법도를 온 세상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후 그는 45년 동안 길 위에서 설법을 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킨다. 이때부터 싯다르타는 ‘깨달은 자’라는 의미의 ‘붓다’가 되었다.
그럼 붓다는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다. 연기법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 연기법은 무상無常(모든 것은 변한다)과 무아無我(‘나’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로 정리할 수 있다.[v]
여기서 이 깨달음에 대해서 깊게 논하진 않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속적인 ‘수행’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덧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우리의 무의식, 즉 카르마로 인해 본래의 모습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의식을 완전히 바꾸는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바로 ‘수행’이라고 부른다.
매일 수행을 실시하는 사람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들에겐 ‘조건화’가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vi] 연기법에 따르면, 우리의 괴로움은 카르마에서 비롯된다. 즉, 우리 안에 괴로움을 유발하는 조건화가 심어져 있는 것이다. 수행을 계속하면 이 조건화가 끊어짐으로써 우리의 행동은 더 이상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다. 이게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다.
이 점에서 <5분 혼잣말>은 관계 개선을 위한 궁극의 비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분 혼잣말>을 지속적으로 훈련하면 우리 자신의 카르마를 인지할 수 있다. 나아가, 싸움을 일으키는 조건화를 끊어낼 수 있다. 나는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지속적인 수행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이를 <5분 혼잣말>에 적용시켰다. 그래서 <5분 혼잣말>은 1년간 하루도 안 거르고 ‘매일’ 5분씩 투자하도록 구체화되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매일 하루 5분을 투자하다 보면, 싸울 때 나의 행동에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 온다. 원래라면 내가 화를 냈어야 하는 순간에 멈칫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조건화가 조금 끊어진 상태다. 이때 멈칫하던 것에서 더 나아가, 혼잣말로 수없이 반복했던 그 행동을 한 번, 두 번 하다 보면 이제는 그 행동이 익숙해진다. 그리고 나면 다신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이때가 바로 조건화가 완전히 끊어진 시점이다. 조건화가 끊어졌다는 것은 무의식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무의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나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vii]
여러분 중에는 ‘이거 또 명상 하라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5분 혼잣말>이 관계 개선을 위한 수행법 중 하나라는 사실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5분 혼잣말>이 과연 명상 수행법일까?
<5분 혼잣말>을 시작하고 나서 나에게도 몇 년 동안 이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매일 시간을 내서 고요함 속에 나를 맡긴다는 점에서 명상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듯했다. 나는 살면서 명상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었으니, 이게 명상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옛 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스스로 명상법을 찾아 시행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사실 명상인지 아닌지는 내게 크게 중요치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개선된다는 그 효과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이후에 공부를 좀 해보니 <5분 혼잣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명상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의 방법은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 많다. 2600년 전인 싯다르타가 살던 그때에도 그가 여러 명상 수행법을 찾아 배웠다고 하니, 지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상 수행법이 있을 것임이 당연하다.
그중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었던 바로 그 명상법이 바로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알려져 있다. <삼매경>에 따르면, 사마타 수행이란 마음을 하나에 고정시켜 마음이 고요해지는 삼매에 드는 수행이라고 되어 있다.[viii] 오늘날 일반적인 명상법에 관한 책들을 보면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마타 수행이다. 위빳사나 수행은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마음속의 조건화를 파악함으로써 붓다 설법의 핵심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법이다.[ix] 이 역시도 오늘날 대중적인 명상 수행법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호흡을 관찰하다 보면 위빳사나로 넘어가게 되며, <삼매경>에서 붓다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균형 있게 닦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파하였다.[x] 따라서 오늘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명상법이라고 하면 바로 이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5분 혼잣말>은 명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명상은 호흡을 관찰하거나 마음을 가만히 바라봄으로써 내 마음을 ‘비워내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일상으로부터 마음속 고요함과 평온을 되찾고자 한다. 반면 <5분 혼잣말>은 마음속을 ‘채워 넣는’ 수행법이다. 이후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5분 혼잣말>은 과거에 싸웠던 장면을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함으로써 같은 실수의 반복을 피하고자 하는 훈련법이다. 명상보다는 학생들이 수학 공부를 할 때 어려운 문제를 맞히기 위해 비슷한 문제를 여러 번 푸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스포츠 선수들이 머릿속에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경기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5분 혼잣말>을 훈련한 이후에 나는 명상에도 관심이 생겼다. 명상을 실제로 연습해보기도 했고, 온라인 명상 모임을 직접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5분 혼잣말>이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에서는 명상보다 더 효과적이다. ①먼저 명상은 우리 머릿속을 비우는 행위이기에 <5분 혼잣말>보다 더 어렵다. 우리의 머릿속은 끊임없이 생각이 떠오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머릿속에 생각을 비우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②<5분 혼잣말>은 명상에 비해 목적 지향성이 강하다. 그래서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 명상의 목적은 내면의 평화다. 이건 삶의 모든 분야에 걸쳐 나타나야 하기 때문에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하기가 비교적 어렵다. 효과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은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인간관계에서는 평온함을 느끼다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을 할 때가 있다. 이때 이 사람은 명상이 과연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갖다가 어느덧 그만두고 만다. 이게 바로 명상을 처음 하는 사람들이 명상을 지속하기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다. 반면 <5분 혼잣말>의 목적은 ‘관계 개선’ 단 하나다. 그래서 다른 삶의 영역은 차치하고, 내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가 기존보다 좋아졌는지만이 유일한 효과의 지표다. 이 효과는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래 지속하는 데 유리하다.
③명상은 이리저리 날뛰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이다. 따라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날뛰는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5분 혼잣말>은 딱 5분이면 된다. 뇌에 특정 생각을 주입하는 행위이기에 속성으로 진행이 가능하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5분 혼잣말>은 명상과 다르다. 또 관계 개선이라는 목적에선 더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명상과 완전히 다른가? 그렇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앞서 본 차이점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법 차원에서 말한 것이지 이와 다른 수행법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서 나는 자애명상과 <5분 혼잣말> 상당히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또한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인도 전통 수행인 반면, 중국 전통 수행 중에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이 수행법은 부처님의 법을 마음속에 반복적으로 간직하는 방식으로 수행을 한다.[xi] 따라서 <5분 혼잣말>은 관상염불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5분 혼잣말>도 관계 개선을 위한 올바른 상을 마음속으로 반복적으로 간직하는 방식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내용일랑 다 잊어버리자. 이 책이 단순히 ‘명상을 하라’는 주장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꽤나 길게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5분 혼잣말>의 효과다. <5분 혼잣말>은 명상과 유사한 점은 있지만 엄밀히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며, 관계 개선이라는 측면에선 매우 효과적이다. 특히 연인과의 관계에 있어 고통을 초래하는 조건화를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위빳사나와 동일한 효과를 가진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인류가 축적해온 아름답고 깊은 지혜를 탐독하기를 즐겼던 나는 이처럼 기독교와 불교로부터 <5분 혼잣말>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그 방법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렇게 오늘날의 <5분 혼잣말>이 탄생했다.
[참조문헌]
[i] 법륜,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정토출판, p.14
[ii] 법륜, 《스님의 주례사》, 휴, p.228
[iii] 이학종, 《붓다 연대기》, 불광출판사, p.215
[iv] 이학종, 《붓다 연대기》, 불광출판사, p.220
[v] 법륜,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 강의》, 정토출판, p.160
[vi] 윌리엄 하트,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 김영사, p.42
[vii] 법륜, 《스님의 주례사》, 휴, p.264
[viii] 이자연, 《붓다의 명상법》, 소명출판, p.100
[ix] 이자연, 《붓다의 명상법》, 소명출판, p.100
[x] 이자연, 《붓다의 명상법》, 소명출판, p.91
[xi] 강명희, 《불교명상입문》, 담앤북스, p.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