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 자랑스러워!
나이 40대 후반에 다시 시작하는 공부?
캐나다의 대학에서 같은 반에 한국인인 비슷한 또래의 그녀는 도무지 내가 이해가 안 된단다. 남편만 공부해도 아들 둘 교육은 무상인데 집에서 편하게 있지 왜 대학에 와서 공부하냐고 묻는다.
그녀는 한국에서 남편이 돈을 벌어서 보내주고 고등학생, 대학생 아이들 둘을 케어하러 캐나다에 왔다고 한다. 내 눈엔 그녀가 더 대단해 보였다. 나는 능력자 신랑이랑 온 가족이 함께지만 혼자서 다 해내는 모습이 더 대단하고 멋져 보였다.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세계 각지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한국인들이 많아 그저 신기한 건 사실이다.
나 역시 큰 준비가 없었기에 걱정이 먼저 앞섰고 다 늙어서 대학교 공부를 하는 건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아이들 뒤에 숨어 지내는 게 싫기도 했고 나도 내 일과 공부가 있어야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덜 할 것이다. 그리고 집안일이 전적으로 내 일이 되는 것 또한 원하지 않기에 평생을 꿈만 꾸던 유학을 도전하게 되었다.
수년간을 글로만 하던 영어 공부가 아니라 말로 영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자는 신랑의 진심에 설득이 되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익숙하고 편한 현재의 터전을 떠나 낯선 나라로 떠나는 결정은 설렘반, 두려움 반이었다. 다행히도 설렘이 좀 더 많았기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 온 지 2주 차에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서 다닌 지 3주 차 되던 주에 listening, writing, presentation까지 3개의 테스트를 마치고 지쳐 있는 내가 투덜거렸더니 "한국인들은 테스트에 강하잖아 다 잘 봤을 거야"라고 위로를 해주던 캐나다 선생님 덕분에 이전 유학생이었던 한국인 선배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도 나오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중학교 때부터 문법, 단어라면 오래도 공부했으니 그 부분은 익숙한 게 사실이었다. 말을 좀 더 해보고
잘하고 싶어 유학을 결심했는데 아카데믹한 영어는 쉬운 게 아니었다. 도전이 익숙한 직업은 아니라 나 역시 낯선 땅에 와서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찾아보고 배우느라 바쁘다. 그러면서 느끼는 건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은 배운다는 것! 꾸준히 하다 보면 영어 글쓰기도 영어로 말하기도 한발 나아가 있지 않을까? 한국에서 영어를 글로 공부했다면 캐나다에선 생존으로 말하기를 해야 하고 그리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문법 좀 틀려도 다 알아들으니 조금만 더 뻔뻔해지자!
학교에 간 첫 주 큰 아들은 반친구들이 워낙 친절해 잘 챙겨주고 자기한테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친구도 생겼단다. 둘째는 같은 반 친구 집에 초대받아 등교한 첫 주말에 약속이 생기고 둘 다 잘 적응하는 게 대견해서 "너희가 엄마보다 낫구나."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실은 따로 있었다. 등교 첫 주에 스쿨버스 배정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부부가 아이를 데리러 오전 오후로 학교를 가야 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끝나고 다들 스쿨버스를 타는 데 몇 몇 친구들이 안 가기에 왜 안 가고 아들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지켜줬는지 한참이 지나 알게 되었단다. 첫 주에 아들이 "My parents have not arrived."라고 말해야 하는데
아들의 발음 실수로 "not alive"로 친구들이 알아 들었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친구들이 측은한 눈으로 더 챙겨주고 친절했던 사건의 진실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둘째는 아이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고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단다. 역시 넉살 좋고 활달한 성격 덕에 적응력의 귀재답다. 이렇게 무탈하게 1달이 지났는데 첫겨울은 다들 아프다는데 무사한 하루하루가 그저 감사했다. 캐나다의 난방 시스템은 공기를 데워 순환하기에 우리의 바닥난방보다 훨씬 건조해 겨울엔 없던 비염이 생기고 코피가 날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주 처음으로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아프다고 데리러 오라고. 하필 내가 대학교에서 writing 시험 보는 시간에 말이다. 한국에선 내가 근무했던 초등학교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아들 둘이 초등 저학년을 보냈다. 어린애를 혼자 두고 나올 수도 없고 조금 아프다고 엄마가 매번 조퇴를 할 수도 없었기에 나의 출근을 위해서도 학교는 아파도 보냈었다. 나 어릴 적엔 아파도 학교는 결석해서는 안된다는 다소 무식한 믿음이 있던 개근상에 못을 맨 시대에 살아서 아파도 학교에는 가서 아프고, 학교는 웬만하면 보내자는 주의인데..
친구들이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안 오는 게(여기는 출석의무일수가 없단다.) 부러웠던 둘째가 학교에서 집에 오고 싶다고 전화까지 했던 것이었다. 학교에선 개인폰 사용이 엄격히 제안돼서 오피스에 가서(한국의 행정실) 겨우 전화를 했단다.
집에 오자마자 조금 쉬더니 다 나아서 팔랑팔랑 게임을 한다. 좀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속으로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나라처럼 보건실도 없는 것 같다 하고 낯선 타국에서 아파서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에 다음번엔 좀 더 상황을 보자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한국과 다른 점이 많이 있지만 캐나다에 왔으니 제2외국어인 불어도 아들들이 배우고 2년 정도 뒤쳐진 진도의 수학도 영어 수업으로 차차 적응해 나가고 있다. 하루는 둘째가 학교에서 사회 숙제를 하는 것을 보다 캐나다의 역사 중 우리나라 6. 25 전쟁에 세 번째로 많은 파병을 한 나라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 세기 안에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다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나라로 발전한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뿐이라는 것도. 내가 사는 캐나다 런던에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제공해 주고자 이민을 결심한 지인은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다 한국에 있지만 자기 세대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주려고 큰 결심을 했는데 아이들 사는 세상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 캐나다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나 역시 캐나다의 삶이 아직까진 한발 한발 적응 중이긴 하지만 몇 년 만에 큰 눈이 지속적으로 내린 이번 겨울이 어서 지나고 따뜻한 봄날이 오길 기도 중이다. 그래야 비염과 감기와도 작별하겠지 싶어서.
캐나다에 사는 동안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다 가고 싶다. 5년 전 나와의 약속도 지키고..
5년 후에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 듣고 싶은 말에 대해 내가 썼던 글을 보다가 지금의 내가 그런가를 돌아본다.
" 참 편안해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