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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08. 2023

인문과학의 시작

메타인문학 03


#인문 #역사

메타인문학 3


인문과학의 시작


인문학의 목적은 두 가지 정도로 집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삶의 즐거움을 느끼며 누리는 일이다. 이것은 삶의 본질이자 모두가 구하는 행복의 근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은 희로애락의 여정이며 애오욕의 드라마다. 오늘날 길면 100년도 넘길 수가 있는 인생에서 어떤 행운의 기회와 불운의 위험을 만날지 모른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즐거운 드라이빙을 위한 ’네비navi’는 필수가 된다. 이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말한다.


자칫 목적지 설정을 잘못하면 고생이 팔자가 된다. 판단을 잘못하면 사고가 나기 십상이다. 차가 부실하거나 정비가 불량하면 내내 고달파진다. 그래서 튼튼하고 건강한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경제력과 경쟁력의 엔진이 된다. 이 과정에도 삶의 신고와 즐거움은 함께한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돈으로 모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안정된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것은 '인문학'의 기초에 해당하지만 대개 이를 소홀히 해온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세상과 생명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본질을 간과하는 까닭이다.

항산항심 恒産恒心
물질이 안정되어야
마음이 안정된다
-맹자

아무리 높은 이상과 도덕과 천재적 재주를 가져도, 이것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물질적 기초를 갖추지 않으면 인문학은 ‘허상’이며 ‘무익한 것’이 된다. 이것은 기초적인 자연 원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장의 물질적 기반이 없더라도 이것에 대한 뚜렷한 인식과 행동이 따라 주면 물질적 조건이 마련되는 것도 자연원리다. 
인문학은 이것을 위한 현실적 지혜를 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인문학의 목적은 '현학'이 아니라 '생활'이어야 한다. 사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더 흥미로운 일이 아닐까?

문사철 文史哲
전통적으로 인문학을 문학, 역사, 철학의 묶음으로 이해했다. 그 중에 가장 기본이 철학인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우리는 가깝고 달달해 보이기 쉬운 문학에 먼저 마음이 이끌린다. 다음은 흥미로운 역사이다. 마지막이 대개 철학 차례다. 이것이 인문학을 하는 자연스런 순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 세가지 주제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문학에 붙잡히면 문학의 숲에 갇혀 맴돌기 쉽고,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방대한 인문의 세계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세월만 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인문의 정수를 꿰어차 보려는 야심을 가지거나, 빠른 시간 내에 인문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철학을 먼저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철학은 근본을 보려는 본질론이다. 근본과 본질은 사실 상식적이며 소박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은 어렵다는 '외설스런' 소문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닌 상식의 상식인데도 소문이 그렇게 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진실을 알리기를 두려워하는 권력의 음모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역사에는 이러한 증거가 수없이 많다.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이 공부하는 '구구단 외우기' 만큼의 노력이면 그 기본은 넉넉히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삶의 본질
왜 철학인가?
철학의 매력은 우리의 관심 대상을 명확히 정의한다는 데 있다. 잘 정의된 문제는 그 자체가 해답이다. 이것이 철학이 가지는 힘이다. 거기서 최고의 해법이 나오기 때문이다. 역사 이래 수많은 현자와 학자들이 인간의 삶을 '정의'한 바 있다. 그중에서 잘만 골라 보아도, 우리는 평범한 일반 언어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말할 수가 있다. 
삶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것은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삶에 대한 실질적 해법을 주는 근본적 물음이다. 이처럼 철학은 본질을 말한다. 본질은 시대와 장소, 삶의 방식은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적인 것은 본래 간단하며 소박하다.


삶을 정의하기 전에 먼저 인간을 정의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앞서 언급한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소박하며 상식적인 정의이다. 

인간은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생명이다. 나는 '나이고자 하는 의지'다. 누구나 모두 그럴 것이다.
이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정의에 철학이 있다. 인간은 '몸과 함께 하는 주체적 의지'라는 뜻이다. 물질로 된 몸에서 정신이 비롯된 것은 현대의 의학과 뇌과학과 생명공학으로도 증명된다. 인간은 ‘심신일원心身一元’적인 생명체이다. 몸과 마음은 인식론으로는 둘로 보이지만, 존재론으로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과학적으로는 몸 없이는 마음도 없다.

종교에서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가 있지만, 근본은 여기서 출발한다. 나머지는 이것에 대한 '해석'일 따름이다. 이 소박한 상식이 철학과 과학의 시작점이다. 
또 인간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가 있다고 본다. 종교적 교리에서 신의 뜻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자연 원리를 통해 그 뜻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원리가 '계시'의 바탕인 것이다.

정신과 마음과 영혼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나’에 대한 정의로부터 합리적으로 도출될 수가 있다. 
인간은 몸과 함께하는 ‘나이고자 하는 의지’로서 기회를 획득하고 위험을 극복하며 삶을 영위한다.
이 소박한 이해가 인간과 생명과 나아가 모든 존재에 대한 설명이 될 수가 있다.

우리의 '나이고자 하는 의지'는 기회와 위험에 대한 판단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하고자 노력한다. 이것은 바로 나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정신과 마음의 생성과 역동이며, 이것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주체 의지가 영혼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나 종교적인 해석은 이기본적 사실을 기반으로 모두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의 설명이든 이 사실로 모두 '환원'될 수가 있다.


철학은 쉽다

이렇게 인간인 나에 대한 객관적 정의를 해 놓으면 철학은 쉬워진다. 나머지는 이것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전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자신의 논리가 타당한지 그때그때 검증하며 헙리적으로 조정하면 된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객관화해 엄밀히 보지 않았을 뿐이다.

철학이나 과학의 기본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즉 진실을 보고, 거기서 진실된 원리(진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철학에는 두개의 영역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무엇이 있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응답이다.
즉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그런데 존재론은 자연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이제는 많은 부분이 자연 과학에게 그 역할을 넘기고 있다. 존재는 자연과학으로 구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서는 빅뱅에서 시작된 물질로부터 세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한 차원 높은 이론이, 고대 동아시아의 태극음양의 일원론적 세계이해이다. 이것은 근대 서구의 스피노자 철학에서 ‘심신일원론’으로 계승되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의 원리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쇼펜하우어와 니체을 거쳐 현대 서구철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어렵다고 '소문난' 철학의 본질은 이것에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대의 뇌과학이나 의학이 입증을 하고 있다. 
최신의 존재론은 '물심일원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을 확장하면 물질 자체도 고유의 특성을 지닌 ‘물적 의지체’로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래는 소박한 일반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론과 인식론이다.

과학적 존재론

삼라만상은
자기로 태어나 자신이 된다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생명은 생명대로 자기가 된다
존재의 목적은 내가 나 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내 주인 되어 존재하는 일이다

과학적 인식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자연원리적으로 보는 일이다
억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입증된 것만 믿는 일이다

이것이 앎과 과학의 기본 원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기본 원칙만으로도 필요한 앎의 대부분을 얻을 수가 있는 21 세기를 살고 있다.
우리가 자주 하기 쉬운 실수는 무가치한 것이 얽매이고, 무의미한 것을 쫓으며, 무력한 허상에 기대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나 되어 홀로 서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수가 있다면 충분한 삶이 되지 않을까?

- 메타인문학 1.0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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