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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Nov 06. 2023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곳

#인문학 #개인주의 #상호주관성


주관과 객관이 만나는 곳


 우리는 이분법을 주관적이라고 여기고 객관적 관념보다 낮게 평가한다. 그러나 이분법은 본능에 가까운 가장 손쉬운 생각법이다. 우리의 생각은 기회와 위험이라는 본능적 이분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분법은 누가 뭐래도 쉽고 명쾌한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다만 주관적 판단과 선택이 누구나 가진 자연원리적 권한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각자의 주관과 선택은 훌륭할 수가 있다.


 우리에게는 객관주의를 높게 평가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객관을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 바람직한 가치로 존중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는 개인의 입장과 선호가 존중되는 개인주의로 발전해 왔다. 자신의 마음이 인도하는 대로 사는 개인주의적 자유가 일반화되었다. 개인의 주관과 개성이 존중받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 '발전'이라 할만한 한 차원 높은 문화 현상이다.


  한때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을 인식과 행동 기준으로 설정해 놓고 서로 맞추고자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다.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노력이다. 전통적 산업사회나 전체주의적 사회에 적합했던 문화이다. 제한된 물질 자원을 사회 전체로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이것은 꽤 성공적이었다. 객관주의가 만든 '표준'의 효율성이 경제 발전과 풍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도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 따르려는 문화가 지배했다. 정치는 '객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용의주도하게 활용했다. 예측가능한 객관에 의한 규율이 지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개인의 자유와 요구 needs의 희생이 자연히 따랐다. 그러나 기득층이나 순종적인 국민은 이것이 편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플라톤적 이상주의의 부작용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객관주의가 주는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객관'이라는 것이 실재하는가? 있다면 어디까지일까? 이것을 필요 이상으로 확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사는 이것은 전체주의와 독재로 가는 길이었음을 말해준다.

어떤 기준과 가치관이 '문화'가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서로 강요하게 된다. 설사 그것이 불합리하더라도 거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불필요한 갈등과 108 번뇌가 양산된다. 불합리한 문화와 기준이 무리와 비효율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의 근본은 실재하지 않는 '객관'에 대한 환상과 의존이다. 객관주의나 이상주의가 필요 이상으로 확장되는 이유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의존하려는 사람이 많거나 그 세력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기준이란 '객관'으로 있지 않다. 각자의 입장과 이익과 선호인 '주관'에 있다. 정말 필요한 일은 각자가 자신의 필요와 자신이 스스로 깨우친 합리를 좇아 자율로 자유롭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연원리적으로 맞는 진정한 합리라는 사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가져온 시대적 변화라기보다는 본래 있었던 자연원리이다.


 개인은 자기 주관을 가진다. 각자 입장과 사정과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삶의 토대이다. 이것은 가까운 가족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자기의 주관적 판단과 선호를 따라 사는 삶이 그에게 가장 맞는 효율적인 삶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원리적이다.


 과학적인 인식을 따라도 자기 일은 결국 자기만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물리적' 입장 차이를 동의할 때, 개인과 사회는 자기의 삶에 더욱 충실해지고 저절로 윤택해지며 자유로워진다.

 한편, 이웃과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인간에게는 합의와 협력은 필수적이다. '인간人間-사람사이'라는 인간의 자기 개념은 명확하다.

 인간은 이런 필요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공감능력을 진화시켰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인식 세계'를 가진다. 공감의 채널이 다양할수록 이 세계는 넓어진다.


 인간의 인식은 본질로는 주관이지만 공통의 인식 세계는 크거나 작거나 분명히 존재한다. 학자들은 이것을 '상호주관성 intersubjectivity'이라고 말해왔다.

이것은 서로의 주관을 존중하면서도 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공통적 주관의 세계'이다. 여기에 공통적 합리의 세계가 있다. 주관의 정신은 이것을 넓히려 노력한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노력을 성공으로 이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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