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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과 처후處厚
세상은 변화와 다양성의 세계이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세계가 지닌 복잡한 '현상'의 이면에는 이를 낳는 '본질'이 있기 마련이다. 본질은 원인이자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나무에 비유하자면, 현상은 나뭇잎이나 꽃과 열매라 할 수가 있고, 본질은 나무의 큰 줄기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인 뿌리와 줄기가 튼튼해지면 자연히 현상인 나뭇잎은 무성해지고 꽃과 열매도 풍부해진다. 본질은 화려하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으며 늘 소박하다. 사물의 앞과 뒤, 일의 시작과 끝의 순리는 이렇게 결정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바쁜 일상을 보내는 우리는 현상 속에 둘러싸여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더욱이 외형적 성과주의가 일반화된 문화 속에서는 본질을 돌아볼 여유는 더욱 없어져, 삶은 소모적이 되기 쉽다.한편 이러한 이치를 알더라도, 어떻게 본질로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본질의 가치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본질은 원인이자 근본이므로, 본질의 장악 여부가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본질은 진실을 낳는 진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진실을 직면하려는 의지와 용기는 필수다. 진실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진실할 필요가 있다. 진실할 때 비로소 진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구하는 간절한 마음이 스스로를 진실하게 만든다. 여기가 삶의 첫 승부처라 할 수 있다. 진실은 이때 스스로를 드러낸다.
다음은 현상 이면에 있는 본질을 알기 위한 탐구 과정이 필요하다. 사실 이는 우리가 늘 하는 생각의 주된 내용이다. 이것을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 핵심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 원리를 아는 '인과적 앎 causal cognition'이다. 다면적으로 관찰하고 가설을 세워서 검증을 하는 반복된 '귀납과정'이다.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여기가 사실상 최종의 승부처가 된다.
모든 합리적 생각은 여기서 성숙한다. 이것을 '과학적 방법'이라고도 하며, 크고 작은 과학적 발견과 성취는 모두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귀납적 과정을 거듭할수록 우리는 본질 가까이 갈 수가 있다. 이것은 '본질론적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가 있다.
이를 통해 현상인 꽃과 열매에 너무 이끌리지 않고, 작은 가지와 큰 가지를 찾아내어 마침내 본질인 줄기와 뿌리를 얻을 수가 있다. 줄기와 뿌리를 장악하여 이를 튼튼히 할 때 나무는 자연히 풍요해진다. 이것에 충실할 때 우리는 꽃과 열매를 풍부하고 오래 얻을 수가 있다.
노자 Laozi는 이러한 지혜를 '처후處厚'라고 했다. 즉 '두터움에 머물러라'는 뜻이다. 근본과 실질인 '본질'을 우선하고 충실할 때 자연스럽게 '현상'의 풍부함을 오래 누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세계는 이처럼 깊은 본질을 담고 있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 원리 가운데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개인은 물론 정치와 경제 등, 세상사의 어려움은 이것이 미처 되지 않아 일어난다.
이처럼 변화 무상한 현상을 넘어 도달하는 본질의 세계는 어떤 곳인가? 거기서 우리는 무엇을 만날까?
이곳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건강하고 소박한 세계라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익숙한 곳이다. 한 때 선망하기도 했던 화려함이나 갈구했던 달콤함이 없이도, 본래 그대로의 온전함이 있는 윤택한 세계다. 우리가 처음 출발한 그곳이다. 모든 긍정과 진정한 가능성을 가진 본래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를 '진리'라 부르기도 하고 '본질'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것은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진실 가운데 '홀로 선 나'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본질은 홀로 서지 못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해답은 각자가 진리와 함께 홀로 서는 일이다.
화려한 선망과 달콤한 갈망은 우리가 단지 의지하려 했던 곳이다. 오롯이 홀로 서지 못해 의지하려 했던 곳이다. 우리의 고단할 수가 있는 삶의 여정은 진실 가운데 홀로 서서 돌아오는 귀향 같은 것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