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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Ryoo 류구현 Jan 12. 2023

홀로서기와  메타인지

메타인문학 05


홀로서기와 메타인지

오늘날의 인문학은 다채롭다. 화려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메타버스의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오늘을 상상할 수가 없으니 스마트폰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셈이다. 메타버스의 세계는 스마트폰과 함께 열리고 있다.
인문학은 이 놀라운 온라인 공간을 만나 꽃을 피운다. 한 컷의 사진이 한 페이지의 글을 대신하고, 한편의 유튜브나 영화가 한 권의 책을 능가하기도 한다. 인문학은 다양한 미디어를 포섭하여 진화하고 있다.
이 끝은 어디일까? 그의 목적지는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닐까? 또 나를 닮은 이웃과 만나 어울리는 일이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로 돌아와 자신에게 의지하는 일이다. 홀로선 나를 만나는 것이다. 

홀로서기
우리는 늘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한다. 잃어버린 무엇을 되찾고 싶고 부족한 무엇을 보충하고 싶다. 이것은 일종의 외로움이다. 이 근원적 감정은 태생의 순간에 얻어진 것이다. 아마도 모체와 분리되었던 운명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연은 그 때 우리에게 명령했다. 홀로 서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이 엄정한 명령은 곧 희미해진다. 오랜 양육의 기간과 문명에 의지하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모체와 물리적으로는 분리되었으나 정서적 탯줄은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자연의 명령은 엄정하다.  



홀로 서기란 이 '운명'을 직면하는 일이다. 이것과 맞짱을 뜨는 것이다. 여기서 외로워 지면 진다. 그런데 이 외로움을 어디서 달래야 하나?  이것은 '본원적 두려움'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이라는 찬스(기회)를 부여 받은 대가이다. 그래서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나 너무 외로워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우리의 오랜 지혜의 말씀은 이것을 말해준다. 

자등명 법등명
自燈明 法燈明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이것은 본래 붓다의 말씀이지만 역사에서 얻어진 경험의 지혜이다.
우리는 각기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 원리인 진리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이미 우리를 보살피고 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구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진리와 하나 된 나에 의지해 홀로 서는 것이다. 진리는 부단히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지혜를 준다. 이것을 알면 이것을 곧 느끼게 된다. 피조물인 우리는 의지하여 생존할 수 밖에 없다. 그 의지처가 밖이 아니라 안이며,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라는 진리이다.


메타인지와 원리적 앎
'홀로 서기'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이해는 한동안 줄곧 자기를 따라 다니게 된다. 이것이 익숙할 즈음엔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홀로 서기는 모체로 분리되었던 기억의 저편으로부터, 온전히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우리의 불필요하고 비능률적인 정서와 감정과 인식의 스펙트럼의 대부분은, 홀로 서기가 되지 않아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우리는 진실과 직면하게 되는 자신, 진리와 함께 홀로선 자신을 만날 수가 있다. 이때 우리는 온전한 인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내가 나 되는 삶을 마침내 시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근의 각광을 받는 교육 이론 중에 '메타인지  metacognition'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한 차원 높은 인식'으로 말해지는 데, 쉽게 말해 '자신의 인식을 객관화하여 얻는 종합적 인식'이다. 여기엔 주인 정신을 지닌 자기, 즉 홀로선 주체가 필수적 요건이 된다.

홀로 설 결심. 이것이 메타인지의 기본적 바탕이 됨을 알 수가 있다. 메타인지는 주체의 능동적 정신작용이기 때문이다. 


홀로 설 때 주관이 선다

주관이 설 때 인식이 바로 선다

인식이 바로 설 때 삶이 바로 선다



메타인지의 본질적 모습은 '원리적 앎'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 인과관계를 살펴서 대상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변화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전제 한다. 사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단지 이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우리의 정서와 감정과 생각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논리적 흐름임을 알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작거나 큰 원리들을 발견하여,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원리적 앎 causal cognition'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메타인지의 본질인 셈이다.

'원리적 앎'은 직관과 논리가 함께하는 근본적인 앎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지식과 정보에 앞서 가지는 원천적 앎이다. 외부적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인식 능력에 의지하는 근원적 앎이다. 여기서 지식과 정보는 다만 참고 자료 역할을 할 뿐이다. '원리적 앎'은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는 주체적이면서도 상당 수준의 논리적 객관성을 확보한 앎이다. 우리의 앎은 이것이 근간이 될 때 진실을 바르게 볼 수 있게 된다.
좀 어려운 내용이지만 자신의 앎의 과정과 대비하고 관찰해 해보면, 이것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가 있는 사실이다.

-메타 인문학 1.0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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